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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북한산과 한양도성’

붓펜과 펜에 의탁하는 새로운 시각의 백묘화

등록일 2020년01월21일 18시1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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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북한산과 한양도성’

붓펜과 펜에 의탁하는 새로운 시각의 백묘화

 


북한산 전경 종이에먹 2014 850X580

 

서울은 세계의 각국 수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북한산을 중심으로 바위산을 한 바퀴 휘두르고 그 중심부에 유장한 한강줄기를 내려놓은 수도 서울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과 강이 함께 하는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 것도 바로 중심축인 서울을 근간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왕조 5백년 도읍지로서의 세는 다했다고 할지언정, 20세기 후반에 다시 세계 속의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으로 보아, 수도 서울이 가지고 있는 지세는 여전히 상승의 세를 타고 있는 셈이다.

김석환이 북한산과 한양도성을 화제로 정하게 된 것도 현대식 건물로 빼곡히 들어차 그 전모를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풍수지세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자는데 의미가 있다. 수려한 북한산과 한강을 하나로 묶은 땅을 도읍지로 정한 뒤 성을 축조하고 궁궐을 세웠을 때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으리라. 화려하기 그지없는 단청으로 장식한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즐비한 구중궁궐은 주변 산수와 어우러져 그 자체가 구름 위의 누각이나 다름없기에 그렇다. 삼각산에 올라서면 한강을 발아래 두고 지그시 누르고 앉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오니 가히 천하를 지배하는 자의 터전으로서 손색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지 싶다.

그러나 세상은 무상한 것이다. 결코 지는 날이 없을 줄 굳게 믿었던 5백년 영화도 한낱 백일몽처럼 사라져버렸다. 고층건물과 널찍한 자동차도로가 거미줄처럼 늘어선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이후 옛 한양도성의 모습은 간데없다. 한 나라를 호령하던 천하의 권세 그 자취마저 현대문명의 그늘 속에 간단히 묻히고 만 것이다. 존재는 하되 영화를 상징하던 구중궁궐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게 됐다. 물론 근래에 와서 허물어진 도성을 복원을 하고 불타버린 궁궐이 하나둘씩 채워지는 가운데 번성했던 조선왕조의 면모가 차츰 되살아나는 듯싶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층건물에 빼앗겨버린 한양도성의 옛 모습은 여전히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늘 이런 안타까움에 가슴앓이를 하던 그가 북한산 등반을 하면서 건축가의 관점에서 수려한 산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둘러쳐진 도성, 그리고 조선의 궁궐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붓을 들었다. 그는 화가가 아니라 건축가이다. 그래서일까. 모필 대신 모필의 기능을 대체하는 붓펜과 연필 그리고 목탄을 잡았다.


 

건축가의 시각이라고는 하지만 작품 하나하나를 보면 그대로 개성적인 수묵산수화로서 흠잡을 데 없다. 흰 종이 위에 실제로 보이는 사실, 즉 실상을 그대로 또박또박 옮겨놓는 실사기법은 영락없이 건축가의 시각이다. 그럼에도 형태를 결구해나가는 기법이나 필치는 수묵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 대다수는 선만을 이용하여 그리기에 백묘화로서의 성격이 명확하다. 특히 궁궐을 소재로 한 작품은 펜을 사용하는데, 그 견고하고 명료한 형태 감각은 건축가로서의 이미지에 합당하다.

어디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고 오로지 견고한 입체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치밀하고 정밀한 조형감각이 그대로 화필로 이행한다. 그래서일까. 그가 묘사한 한양도성을 품에 안는 북한산 일대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종묘 등 조선시대를 상징하는 왕궁 건물이 불현듯 홀로그램처럼 떠오른다. 현실적으로는 고층빌딩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궁궐의 전모가 홀로그램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사진으로도 가능치 않은 옛 한양도성과 궁궐의 면모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회화적인 경이로움이다. 이렇듯이 그의 시선은 타임머신을 타고 5백년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싶다. 물론 조선시대 건축된 건물들을 고스란히 되살리는 것은 아니다. 단지 현재에 존재하는 도성과 건물만을 오롯이 부각시킬 따름이다. 그의 조형적인 감각은 사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까닭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작업을 위해 그는 수차례 수십 차례의 등반, 즉 현장실사를 통해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했다. 사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장 스케치라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다만 시점을 이동하거나 축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뿐 그 전체적인 비례는 실제에 준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결코 공허하지 않다. 사실적인 비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힘든 현장 작업을 고수하는 것은 실제적인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서다. 사진을 이용하는 경우 어느 부분에서든지 왜곡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 묘사하는 경우에는 왜곡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단순히 노고의 산물이거나 기술적인 완성도만을 추구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적지 않은 부분에서는 기존의 수묵산수화가 생각하지 못한 표현기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대다수 작품이 붓펜에 의탁함으로써 섬세하고 명확한 선과 형태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선은 골기가 성하다. 부드러운 모필이 가지고 있는 쓰임새와는 좀 다른 붓펜은 사용할 때 손의 힘을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형태를 묘사할 때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더구나 균질한 힘을 가할 수 있어 선의 형태적인 안정성을 보장받게 된다. 다시 말해 동일한 굵기와 모양의 선을 구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속사가 가능하여 현장작업에 적합하다. 이렇듯이 적지 않은 시간이 투척되는 현장작업을 가능케 한 것도 붓펜의 남다른 기동성 및 효용성에 기인한다.


 

먹을 이용하면서도 모필과 다른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게 된 것도 붓펜의 결과이다. 선의 형태를 보면 속도감과 더불어 균일한 형태 감각이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고 작은 수많은 선이 집합하여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작업의 특성상 붓펜은 그 자신의 조형감각에 가장 민첩하게 반응하는 도구인 셈이다. 이렇게 형용되는 북한산전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다. 무수한 선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산의 형태에다 장엄한 산세 및 기세를 응집시키고 있다.


 

그가 한양도성과 조선왕조의 궁궐을 하나로 묶어 스케치를 하게 된 것은 북한산 등반이 계기였다. 건강을 위해 등반을 시작하면서 빼어난 산세를 지닌 북한산에 점차 매료되었고 습관처럼 종이와 붓펜으로 옮겨놓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산의 부분적인 묘사에서 전체로 발전하여 마침내 전경을 담는 데까지 이르렀다. 북한산을 여러 방면에 보면서 이곳저곳을 그려가는 동안 작업은 마치 퍼즐조각처럼 쌓이게 되었다.

부분도 하나하나를 조합하여 연결하면 북한산의 전모가 떠오르게 될 정도가 된 셈이다. 여기에서 그는 북한산 전경을 착상하게 되었다.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북한산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다가 전경을 구상하게 됐다. 그리하여 시점이동과 원경 그리고 축약 기법을 통해 북한산의 여러 다른 모습의 전경이 갖추어진 것이다.

10수년 전부터 시작된 작업이기에 붓펜을 다루는데 아주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부분에서 기존의 수묵화와는 다른 기법이 강구되었다. 이는 곧바로 모필을 사용하는 수묵화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화법이 될 수 있다. 가령 동글동글한 모양의 작은 선들이 무수히 반복하여 만들어지는 산의 형세는 아주 독특하다. 겸재가 인왕산의 암벽을 표현할 때 강구한 평평한 이미지의 준법처럼 그 또한 긴 세월 풍화에 마모된 동글동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북한산 바위를 적절히 표현하는데 따른 화법을 스스로 개발한 셈이다.


 

이렇듯이 그의 작업은 단순히 실사, 즉 실재하는 물상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시각이 담긴 회화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점묘법에 근사한 무수한 태점으로 산을 형용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붓펜을 뉘어 사용함으로써 힘차고 굵직한 선이 갈필효과를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수묵담채라고 할 수 있는 선염기법을 적용하는 작품이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이 그로서는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이 따르고 있다. 이는 모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실사를 통해 강구된 표현기법 및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 및 소재를 바로 눈앞에 두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다. 지적인 조작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동원해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쓰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강구해낸 다양한 기법은 기존의 수묵산수화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필에만 의탁해온 기존의 수묵산수화와는 다른 표현기법이 가능한 것은 역시 붓펜이나 목탄, 연필 등의 도구를 사용하는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기존의 수묵화와는 엄연히 다른 시각적인 이미지 및 정서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북한산 실경을 시작으로 하여 한양도성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북한산을 그리자면 한양도성을 건너 뛸 수 없고, 북한산을 물리치고는 한양도성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고 보면 북한산과 한양도성은 한 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한산 줄기를 직접적으로 물고 앉아 있는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은 물론이려니와 덕수궁과 경희궁도 북한산 끝자락을 쥐고 있는 형국이니, 5대궁궐이 조선 5백년 도읍지로서의 위용을 갖추는데 북한산은 필수였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현실적으로는 이들 5대궁궐과 북한산이 한 몸처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형세를 찾아볼 수 없다. 궁궐을 감싸 안는 성벽 밖으로는 현대적인 콘크리트 건물 숲이 옭죄어들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변화로 숨쉬기조차 버거워하는 상황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빛을 잃지 않는 궁궐의 옛 건축물들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따라서 조선시대로부터 비록 1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으나 그 시간의 갭을 메울 수 있는 조형세계를 통해 수려한 산수를 두른 한양도성 본래적인 아름다움을 회고할 수 있다싶어 궁궐과 도성을 하나씩 그려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북한산을 시발로 하였으나 한양도성, 더구나 궁궐의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빼놓고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북한산 그림은 성립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시선을 한양도성으로 옮기게 된 셈인데, 실제로 한양을 껴안는 북한산 이곳저곳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는 도성을 따르다보니 필연적으로 궁궐로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거듭 확인하게 되었다. 이왕지사 한양도성은 궁궐을 옹위하기 위해 축성되었으니, 북한산과 한양도성 그리고 궁궐이 하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옛 모습이야말로 조선5백년 도읍지의 진면목일터이다. 그리하여 그는 무너진 궁궐을 복원하듯이 주변의 현대적인 풍경을 내리고 원래의 한양도성과 궁궐의 면모를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물론 한양도성과 5대 궁궐을 좇아간다지만 조선시대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양도성과 궁궐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그 아름다움을 살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과정에서 다각도의 시점이 전개되었다. 특히 시점이동은 물론이려니와 원근법, 부감, 앙각, 수평구도, 축약 등의 기법을 통해 한양도성과 궁궐의 자태를 실제적으로 묘사하였다. 작품에 따라서는 정밀묘사 수준에 이르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건축가다운 치밀한 조형적인 구조를 의식하며 작업하였다. 이러한 시각이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은 나지막한 삼각산을 배경으로 배치된 궁궐 건축은 세계 어느 옛 궁전이나 성과 견주었을 때 그 아름다움이 단연코 으뜸이다. 그대로 한 폭의 그림으로서 탓할 데 없는 수려한 산수, 즉 북한산과 삼각산 그리고 인왕산 줄기를 병풍처럼 거느리고, 앞으로는 유유자적 흐르는 한강수로 발을 적시는 경복궁의 건축미는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그 사상적인 틀에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그의 작가적인 시각은 이러한 사상적인 틀을 근거로, 나직하게 앉은 경복궁의 평안함으로부터 시작하여 건축물 하나하나에 시선을 옮기면서 손으로 어루만지듯이 차근차근 형용하였다.

 


 

더불어 창덕궁 또한 마찬가지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산은 물론 주변 경관을 배제한 채 창덕궁의 전모를 선묘로만 묘사한 부감구도의 작품은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부감구도 및 원근법으로 접근함으로써 옛 건축물의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이도록 했다. 이는 일찍이 본 일이 없는 시점을 통한 창덕궁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원근감을 강조함으로써 조형의 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그는 궁궐의 외형에서 내부로 시선을 옮겨가면서 일반적인 수묵산수의 개념에 합당한 보다 회화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다. 일반적인 수묵산수와 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구도를 채택하여 나무와 연못 그리고 기와집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이러한 작품은 수묵산수화가 요구하는 조형미에 명료하게 화답한다. 실사 중심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생동감이야말로 그의 강점일 수 있기에 그렇다.


 

한양도성 그 성곽과 거기에 물려 있는 사대문은 물론이려니와 작은 문들을 빼놓지 않고 서술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5대 궁궐과 더불어 그를 감싸 안는 성곽과 문을 모두 완성하는데 집중했다. 물론 그 이전에는 북한산의 전체적인 형상과 더불어 다양한 시점으로 구석구석까지 살피는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북한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과 노력이 경주된 결과일터인데,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북한산과 한양도성의 완성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현실적인 감각으로 돌아와 빌딩으로 빼곡히 들어찬 현대적인 서울을 묘사하였다. 한양도성의 자리에 과거를 묻고 들어선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현실풍경은 그 나름대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일이지만 북한산과 남산이라는 자연과 함께 하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비록 현대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이미지일지라도 아름다운 산과 숲과 나무가 함께 어우러지면 그대로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한양도성과 현재의 서울시는 시간의 차이가 크고 공간적인 상황도 많이 다를지언정 북한산이라는 변하지 않는 자연풍경과 그 자연미를 해치지 않고 축성한 도성의 옹위 아래 여전히 빼어난 수도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의 작가적인 시각은 바로 여기에 겨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ANN

 평론_ 신항섭 미술평론가

스케치_ 김석환 건축가 

 


 

안정원·김용삼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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