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hansanseong Fortress_ 남한산성의 건축 미학
인류 역사를 빛내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부드러움과 강인한 한국적 정서를 담아낸 생명력 넘치는 이 땅의 세계문화유산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1936년 병자호란 때 청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임금과 조정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벌어지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어 익히 화제가 된 바 있다.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하기에 치욕을 견뎌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대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첨예한 대립은 인조(박해일)의 번민과 어우러져 역사상 치열했던 47일간의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몰고 간다. 나아갈 곳도 없고 물러설 곳도 없던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역시 영화의 듬직한 배경이 되어 청군의 포위기간 동안 성 내·외부에 벌어지는 상황을 속속들이 스크린을 통해 전해주었다. 영화의 시나리오가 된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 역시 산성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조선 왕과 충신의 대립, 그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오랫동안 사랑받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어 남한산성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경기도 광주의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북한산성과 더불어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돌로 쌓은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유래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거점성으로 출발한다. 남한산성은 그 이름에서 잘 드러나듯 수도 서울을 지키는 4대 요새 중의 하나로 주봉인 청량산과 연주봉, 망월봉과 벌봉의 여러 봉우리를 서로 연결하여 촘촘히 성벽을 쌓은 것이 특징적이다.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의 외성과 5개의 옹성을 연결하여 견고한 방어망을 형성한 것이며, 현재까지도 동·서·남·북문루와 장대·돈대·보·누·암문·우물 등의 다채로운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이 여러 차례 증개축을 거치면서 여전히 늠름한 모습으로 산성을 지키고 있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는 1971년 3월 17일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입증 받으며 널리 사랑받고 있다.
남한산성이 인조가 청군에 무릎을 꿇은 치욕의 역사적 현장이지만 그 빼어난 경관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한곳에 느낄 수 있기에 서울 근교에서 손꼽을 만한 명소로서 충분한 자격을 지닌다. 자연석을 활용하여 큰 돌을 하부로, 작은 돌을 위로 단단한 석축으로 쌓은 약 8km의 산성 둘레는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탓에 산세와 어우러져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한다. 전쟁을 대비하고 대피 산성으로서의 자격 요건을 두루 갖춘 남한산성의 모습은 흡사 병풍처럼 험한 산세를 아우르듯 굴곡진 높은 성벽을 따라 동서남북으로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이 안정적으로 산성 전체에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것은 무엇보다 처음 마주치는 성벽과 문루이다. 성의 동쪽에 위치한 동문은 좌익문이라고 불렸으며 폭 3.1m, 높이 4m의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은 홍예식 성문이다. 동문의 특징은 성문보다 낮은 지형을 활용해 계단을 따라 올라설 수 있으며, 성문 위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을 형성한다. 성의 남쪽에 자리한 남문은 지화문이라고 불렸으며 성벽의 안전을 위해 성축면에 구배를 두어 안으로 옥아들게 한 것이 자못 특색 있다. 중앙에 높이 4.75m, 폭 3.35m, 길이 8.60m로 홍예문을 두고 문루와 지붕은 정면 3칸, 측면 3칸 초익공계 양식의 팔작지붕이다. 남문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처음 성안으로 들어온 곳으로 잘 알려진다. 산성 서쪽에 있는 서문은 우익문이라고 불렸으며,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의 홍예식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서문은 인조가 청군 진영에 항복하러 갈 때 지나갔던 문으로 병자호란 당시의 비통함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전승문이라고 불렸던 홍예식 북문은 1624년 신축된 성문으로 1779년 성곽을 개보수 당시 싸움에서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한산성의 북문과 서문을 에워싸고 있는 성곽은 하나로 연결된 본성으로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 남쪽에 신남성이 있으며,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1624년 증개축 당시 둘레만도 7,545m에 달한다. 성곽 바깥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연주봉 옹성 역시 성벽에 달라붙어 오르던 적군을 옆에서 공격하기 위한 돌출된 시설로 성곽의 모습을 풍성하게 해주고 있다. 비상시 출입을 위해 은밀하게 설치된 암문은 적의 눈을 피해 병기와 식량 등 물자를 운반하거나 외부에 구원을 요청하는 통로로 활용되어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야 할 곳이다. 암문의 안쪽에 쌓은 옹벽은 전투가 벌어질 때 무너뜨려 폐쇄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성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문화재와 건축물 역시 남한산성을 빛나게 할 보석 같은 굵직한 존재들이다. 축성 당시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지었고 동서남북으로 전장을 관찰하고 지휘하던 5곳의 장대가 있었지만, 현재는 18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수어장대(서장대)가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높은 지형적 위치만큼 성곽을 내려다보고 적을 감시하는 전투의 지휘소 역할을 하는 장대는 대개 단층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남한산성과 수원화성의 경우 2층 누각 형태를 띠고 있어 특이하다. 영조 때 다시 지어진 수어장대 누각의 바깥쪽 편액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안쪽 편액에는 무망루(無忘樓)라고 써져있고 이는 인조의 시련과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온 효종의 비통함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수어장대의 건축적 면모는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둥근 기둥, 1층이 정면 5칸 측면 3칸, 2층이 정면 3칸 측면 2칸인 화려한 익공계 팔작지붕 구조를 통해 당당한 위용을 뽐낸다. 수어장대에 오르면 멀리 서울 시내와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등의 도심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절묘하게 펼쳐진다. 수어장대 역시 병자호란 시기에 인조가 40일간 머물면서 항전하던 곳으로 전쟁 당시는 단층 누각이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국가사적 제480호로 정무시설은 물론 종묘사직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아 반드시 들려보아야 할 건축물이다. 왕이 도성 밖으로 행차하거나 피난할 경우를 위해 준비된 예비 궁궐을 일컫는 행궁은 상궐과 하궐로 나뉘며, 임금의 처소인 내행전, 외행전과 후원인 정자도 마련되어 있다. 내행전은 왕의 처소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의 건물로 구성되며 가운데 3칸은 대청을, 좌우 2칸씩은 온돌방과 마루방을 형성한다. 행궁 내에서도 가장 격식이 높은 내행전은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 개 겹쳐 쌓은 이익공 형식이며, 장방형으로 가공한 돌을 3단 쌓아 만든 기단과 팔작지붕으로 장엄함과 안정감을 지닌다. 하궐의 중심 건물인 외행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이지만 내행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6m 낮은 곳에 위치한다. 행궁 외곽 담장의 정문인 한남루는 2층 누각으로 빼어난 구조 미학을 보여주며 상·하궐과 틀어진 배치를 보여줌으로써 진입 시 더욱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한강 남쪽 성진의 누대를 의미하는 한남루는 2011년 복원한 것으로 누문 주련(얇은 판자에 글을 새겨 걸어두는)에는 앞뒤로 8편을 걸어놓아 건물의 안정감을 북돋아준다. 영화 속에서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머물던 내행전은 비좁고 소박한 공간으로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행궁은 1909년까지 잘 보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고 1999년 발굴 조사를 거쳐 2004년에 이르러 내행전과 행궁 좌전을 준공하였다. 그밖에 내행전의 북쪽의 좌승당, 광주부 유수로 사용하던 하궐의 일장각, 조선 왕조 임금의 신위를 모신 정전과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영녕전,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인 이위정 등이 내·외행전을 중심으로 한껏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숭렬전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으로 병자호란 때 싸우다 전사한 이서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며져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인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의 공사를 맡았지만 누명을 쓰고 죽은 이회와 그의 부인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인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3학사인 윤집·홍익한·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는 사당으로 우국충절을 장려하기 위해 세워졌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침괘정은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로 전해지며 무기고나 무기제작소의 집무실로 사용하던 곳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인 연무관은 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무술 연마를 위한 곳으로 그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인 지수당은 조선시대 고관들이 낚시를 즐기던 곳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건물 앞뒤로 3개의 연못이 있었지만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 내에는 이미 존재하던 망월사·옥정사 외에 국청사·동림사·개원사·천주사·장경사 등 7개의 사찰을 인조 때 추가로 건립하여 모두 9개의 사찰이 들어서 있었다. 절 이름에서 잘 드러나듯 대부분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안위하는 사찰이었고 산성 곳곳에 보물처럼 흩어져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인 망월사지는 남한산성내에 있는 9개의 사찰 중 가장 먼저 지어진 사찰 터로 모두 불탔지만 90년대부터 새로 짓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인 개원사지는 승병의 총 지휘소로 사용되던 사찰 터로 호국 사찰로 번창하였지만 1970년 화재로 모두 불타버리고 겨우 작은 건물 1동만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인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지을 당시 승군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곳으로 9개 절 중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산성 동문에서 2㎞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장경사는 조선 후기 다포계 양식에 팔작지붕을 얹은 대웅전과 요사채 3동이 있다. 산성 축성 때 세운 국청사는 일제 때 폭파되었지만 1968년 재건되었고, 망월사가 복원되었다.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옛터에서 시작해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구축한 남한산성은 해발 480m의 험준한 산세를 활용해 지은 빼어난 방어 산성으로 가치를 지닌다. 그 둘레만도 자그마치 12km에 달하며 산위에는 넓은 분지가 있기에 왕실과 백성을 위한 대피처로서 손색이 없었다. 또한 남한산성은 축성술 측면에서 7~19세기를 거치면서 동아시아(조선, 아즈치·모모야마시대, 명나라·청나라)의 상호 교류와 무기 체계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산성이 축성되고 이겨온 오랜 세월만큼이나 켜켜이 쌓아온 건축적 무게는 인류 역사를 빛낼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로 인정되어 2014년 6월 유네스코총회를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내외 여느 산성과 달리 남한산성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임금이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는 임시수도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는 흔치 않은 산성이었기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산성을 쌓은 모습 역시 동서로 긴 타원형 포곡식으로 한국적 산세와 둥글둥글한 마을의 정서를 넌지시 닮아있어 편안하게 인식된다. 주변 풍경을 아우르듯 성벽 높은 수어장대에 올라 관조적인 자세로 오랜 세월 모진 풍세를 견디고 꼿꼿이 견디어온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음미해본다. 그 속에서 남한산성의 견고하고 흐트러짐 없는 건축·문화적 자태는 우리에게 나라의 위기와 극복, 일제치하와 한국전쟁의 상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미리 준비하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소중히 일깨워주고 있다.
비비안 안 발행인 겸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