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석환의 매화그림전 ‘갤러리 꽃피다’
"나의 매화 그림은 평면 위의 조형 탐구 수단이며, 내가 느낀 매화의 성격이 형상으로 드러난다"
몇 해년 도봉갤러리에서 매향천리(梅香千里) 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한 후 다시 매화 그림전을 열게 되었다. 평소에 꾸준히 작업해 온 북한산과 한양도성 그림은 서울의 입지를 기록한다는 목표 의식을 갖고 오랫동안 직접 현장에 가서 그려온 것이지만 매화를 그릴 때는 그것을 떠올리며 상상하는 인상을 그린다.
매화 그림은 꽃 그림이지만 내게는 꽃 그림을 그린다는 의식이 없다. 매화는 꽃 이전에 고고함을 상징하는 정신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그러한 상징성과 더불어 탄력 있는 선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꽃망울의 형상이 품격 높은 맵시를 지니고 있다. 나의 매화 그림은 매화 필 무렵 그러한 자태에 마음이 이끌릴 때 순간적으로 빠른 필선을 구사해 나타낸 것이다. 일과후 가끔 조용히 그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이면 매화를 사군자의 하나로 꼽으며 애호했던 옛 선비들의 마음과 동화되는 듯 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매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때 교과서에 매화 이야기를 읽고 깊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오두막집에서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살던 어머니가 겨울에 병이 나서 앓아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매화가 보고 싶구나, 매화를 보면 병이 씻은 듯이 나을 것 같구나” 아들은 그 말을 듣고 매화를 찾으러 산으로 갔다. 철이 일러 피어 있는 매화를 보기 어려웠지만 어머니의 병을 낳게 하려는 효심으로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온 산을 헤매며 찾았다. 그러다 문득 매화를 발견하고 한 가지를 꺾어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니 씻은 듯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그 후로 매화를 특별히 여겨왔다. 성인이 된 후로는 그 특별한 기품에 이끌렸다.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꼽히며 옛부터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 모습이 기개와 고고함을 풍겨서 사군자의 으뜸으로 꼽았다. 현대에도 문인화라는 명칭으로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매화는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피어나는 상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혹한의 겨울을 견디고 찬 기운이 가시기 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 막 피어나는 꽃망울은 고고한 기품을 띤다. 메마른 가지에 맺힌 꽃망울이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의 환희를 일깨운다. 매화는 꽃망울을 막 터뜨릴 때가 가장 아름답다. 우주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된다. 모든 꽃이 그렇듯이 확 피어나고 나면 곧 시들어서 형체가 일그러진 몰골이 되고 만다. 꽃이 시든 모습은 차마 보기 어렵다.
나는 오래전 옥상에 매화 한그루를 심고 작은 서재를 지어 일매헌이라 했다. IMF의 어려운 시절 겨울의 차가움을 견뎌내는 매화의 덕목을 떠올리고자 했다. 그처럼 가까이서 매화를 오랫동안 대해왔다. 겨울 끝자락에 봄기운이 막 대기에 번질 무렵 매화가 꽃망울을 떠뜨릴때면 잠시 딴세상 같은 순간을 느끼곤 한다. 그럴 때면 틈틈이 그 인상을 일필휘지로 담아내곤 했다.
매화는 찬기가 채 가시기 전 산천초목이 모두 몸을 움츠린 때 바짝 메마른 가지에서 피어오른다. 가지는 앙상하고 오래된 가지에는 검버섯처럼 돌기가 생겨난다. 새로 자라난 가지는 힘차게 쫙쫙 뻗쳐 있기도 한다. 나의 매화 그림은 그러한 매화의 생태를 담고자 했다.
매화 가지를 보면 그 뻗어나간 형태에서 생명력이 응축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묵은 가지에서 싹 눈에 움이 터 새 가지가 돋아난 후 옹알이 하듯 햇빛을 쫓아가고 다른 가지와 잎의 그늘에 가려 발육이 움츠려 들기도 한다. 그리고 성장하는 동안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자라나는 제 스스로의 무게에 처져 내려가다 다시 햇볕을 쫓아 솟구치려는 기운이 반복되면서 탄력 있는 형상이 된다. 나뭇가지의 형태에는 그 같은 환경과 발육 과정이 작용되어 있다. 힘차게 뻗어나가는 기세를 보이기도 하고 똬리를 틀 듯 기운을 응축하며 느리게 자라난 부분도 있다. 결국 하나의 가지마다 세월풍상이 서려 있게 된다.
나의 매화 그림은 매화의 생태와 모습에 담긴 맵시와 조형감각을 담아내고자 한다. 매화는 혹한을 이겨낸 굳세고 강인한 생명력, 뒤틀린 가지에 서린 인고의 응축된 기운, 한껏 기운을 발하며 곧게 뻗은 가지의 기세, 앙상한 가지에 맺힌 꽃망울들과 막 터뜨려진 신비한 환희의 감각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백지 위에 매화 한 가지의 선을 그린다. 선은 탄력과 기운이 느껴지도록 손목에 힘을 주어 단숨에 긋는다. 빈 종이에 그려진 하나의 선은 여백과 그려진 선 사이에 긴장감이 형성된다. 그 다음 그 긴장감을 유지하며 조형적 풍부함이 갖춰지도록 추가로 선을 긋는다. 가지에 막 꽃망울이 맺힌 것, 조금 부풀어 오른 것, 막 피어난 것, 여러 방향에서 보이는 활짝 핀 모습 등을 생태적 특성이 드러나도록 한다. 가지의 선과 꽃망울이 화면의 공간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갖추도록 안배해 나간다. 한 가지를 그린 후 선이 추가되면 먼저 그은 선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조화를 이루며 조형 감각이 조금 더 풍부해지게 된다. 굵고 가는 선, 선의 방향에 따라서 상호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점차 복잡성을 띠게 된다. 하지만 선이 너무 많아지면 조형적 힘이 약화되기도 한다.
매화 가지를 그릴 때는 막 피어나는 생명력을 드러내기 위해 몸에 기를 모으고 부드러운 모필의 붓을 마치 검을 휘두르듯 단숨에 긋는다. 나의 호흡과 기운을 화면에 불어 넣어 형상으로 살아나도록 한다. 그런 과정에서 매화의 본성을 닮은 기와 형상의 복합체가 된다. 매화의 본성을 드러내고자 내가 그린 필선에 천지기운이 실리고 선과 꽃의 형상이 살아 꿈틀댄다.
선의 굵기와 방향, 탄력과 기세가 담긴 선의 형태,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모습 들이 한데 어우러져 메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어날 때의 생명력과 환희의 감각이 담겨지도록 한다. 한 그루 나무에도 메마른 것, 윤택한 것, 응축된 것, 활달한 것 등 가지의 표정이 가지각색이다. 빈종이 위에 매화의 인상과 그 특질을 살리며 각기 다른 크기와 가로 새로 비율에 따라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그려나가는 과정은 고스란히 백지 위에 새로운 조형을 창조하는 창작 행위가 된다.
나의 매화 그림은 결국 평면 위의 조형 탐구 수단이 된다. 그것은 건축가인 내 직업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매화 그림 역시 그리는 사람의 품성에 따라 각기 다른 개성을 띠게 된다. 나의 매화 그림은 내가 느낀 매화의 성격이 형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까칠한 가지에서 돋아나는 생명의 신비, 뒤틀리고 이따금 곧게 뻗은 가지의 힘찬 기운, 만개한 꽃송이의 화사함이 내가 갖고 있는 매화의 인상이다.
천지가 약동하는 이른 봄 필선의 힘을 실어 소박하게 담아낸 매화 그림을 감상해주시길 기대한다. ANN
2023년 3월 一梅軒에서 김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