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관습 속에서도 성 고정관념을 떠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새로운 형태로 정체성을 쟁취하는 자기서사를 읽어내려 갈 수 있어
‘천 개의 횡단, 다발 킴의 레드스타킹’전이 오는 12월 15일까지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다.
다발킴 작가의 ‘천개의 횡단’은 사회적 관습과 성별이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 다각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동시대의 담론에 대한 예술적 해답을 찾는 과정이다. 자신을 탐구하는 작가의 여정을 사진, 드로잉, 설치, 영상 그리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통해 현대인에게 새로운 여성상과 자아탐구 방법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 다발 킴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 소망과 꿈속에서 본 상황들을 전개시키며 독창적인 작업을 이어왔다. 2019년 공개하는 신작은 불모지를 탐험하다 발견한 식물 ‘유카(Yucca)’가 작가가 탐구해온 자아와 결합되면서 ‘레드스타킹’을 착용한 퍼포먼스로 발화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원초적이며 도전적인 자신의 여성 아이덴티티를 표현해낸 작가만의 독창적인 작품은 작가가 어떻게 진정한 자아를 정의하는지를 보여준다.
다발킴, 19세기 자화상을 들고 있는 레드스타킹, 미국화이트사막 퍼포먼스 사진, 피그먼트 프린트, 100x55cm, 2018
“내가 사막에서 붉은 스타킹을 신고 다니는 이유는 붉은 스타킹이 바로 현실의 몸과 상상의 몸을 이어주는 하이픈이기 때문이다.” 다발킴 작가는 누구나 건너야 할 자신만의 사막이 있다고 말한다. 작가가 말하는 블루스타킹은 18세기 문학을 좋아하는 여성이나 여성문학가를 자처하는 지식인 여성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단어였다.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성, 소수자, 페미니스트인 여성들을 억압하는 상징성을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레드스타킹’은 ‘블루스타킹'의 상징적 의미를 21세기 버전으로 바꾼 것으로, 여성 스스로도 육체적 경험이 담긴 이야기, 여성의 내면에 깃들인 욕망, 꿈, 감정 등과 같은 중요한 주제에 대해 침묵해왔음을 지적한다. 작가가 여성작가로는 드물게 몇 달 동안 사막에서 유목민과 같은 삶을 살아보면서 ‘레드스타킹’을 신은 퍼포먼스를 기획한 의도는 각자의 ‘레드’, 다시 말해 잊고 있던 여성의 열망을 드러낸다는 주제의식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려는 미장센(Mise en scene)이었던 것이다. ‘레드스타킹’을 신은 여성은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성별뿐 아니라 인종과 신분 등 세상의 모든 잣대에서 자유롭다. 경계를 짓고, 벽을 쌓아올리고 구분하려드는 이분법적 가치관을 벗어나 대립 넘기,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다.
이렇듯 작가 다발 킴은 시각예술, 패션, 음악이 협업된 융복합 공연에서 레드스타킹을 신고 사막에서의 퍼포먼스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임으로써 당연시 되어왔던 기존의 질서 속에서 여성예술가로서 자신에게 부족했던 철학적 성찰은 무엇인지를 오롯이 제시한다. 한편, 서로 다른 삶의 경계와 여성 간의 차이를 넘어서는 인식의 전환점은 어디인지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다발킴, ÅLVIK, NOR-WAY_Female Warrior of DAMMAN, 노르웨이 퍼포먼스 촬영, 76x43cm, 2019
‘천 개의 횡단’전은 작가가 혼자 도전하는 기록적 다큐멘터리이자 예술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긴 여정이다. 새롭게 시도하는 다발 킴의 작업은 생명이 끊어진 듯한 척박한 자연, 사라진 유적, 폐허가 된 마을에 숨을 불어넣는다. 자신의 존재를 원초적 발원지에 끊임없이 투영하며 현실의 가면을 하나씩 벗어낸다. 진정한 자신을 만나는 모습은 마치 푸코의 ‘파르헤지아(Parrhesia)’와 같다. ‘두려움 없이 말하기’로 해석되는 파르헤지아는 있는 그대로 자신을 눈앞에 세우는 용기,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도전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실천이다.
‘천 개의 횡단’ 전에서 선보이는 신작은 다발 킴 작업의 주제 변화 뿐 아니라 형식적 변화를 한 눈에 보여준다. 메르헨적이고 그로데스크한 드로잉 작업을 이어오던 작가는 이제 진실로 마주한 자신의 모습처럼 현실로 튀어나간 입체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두발을 딛고 서서 펼친 퍼포먼스를 촬영한 사진과 긴 여정이 표출된 설치 작품은 마치 희곡이 펼쳐지는 무대와 같다. 특히 긴 탐험의 시간을 판타지화 한 애니메이션은 드로잉에서 한 단계 발전된 작가의 스토리텔링을 엿볼 수 있다.
다발킴, Fearless Speech, 87x73cm, Ink on Paper, 2019
‘나만의 레드스타킹을 찾아서’란 전시를 통해 관객은 척박한 관습 속에서도 성 고정관념을 떠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새로운 형태로 정체성을 쟁취하는 자기서사를 읽어내려 갈 수 있다. 한편, 전시는 참여형 퍼포먼스에 직접 개입하고, 편견 속 ‘나다움’과 나의 ‘여성’을 새롭게 정의 내리며 스스로 자신의 레드 스타킹을 신어보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다발킴, 모로코 여성과 레드스타킹, 모로코 퍼포먼스 촬영, 76x57cm, 2019
모든 예술의 지향점이 그러하듯,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경외가 깔려 있는 것이다. 다발 킴 작가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드에서 이학석사를 졸업한 후, 미국, 중국, 인도, 몽골, 코스타리카, 독일, 오스트리아, 호주, 스페인, 모로코 등 국내외 다양한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전시에 참여했으며, 다양한 아트 관련 워크숍과 아트 프로젝트를 기획해 활발한 예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포스코미술관(2010), 소마미술관 드로잉센터(2012) 등에서 15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50여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천개의 횡단전이 열리는 사비나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작품인 아름다운 미술관이란 평가를 받으며 37회 서울시건축상을 수상한 건물이다. >>다발킴 작가,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강재현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이민진 큐레이터, 자료_ 사비나미술관
다발킴, 화려한 행렬, 노르웨이 퍼포먼스 사진 & 피그먼트 프린트, 142x80cm,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