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이수열의 건축이야기 03 ‘나의 스승 조르죠 그라씨 Giorgio Grassi’
Architecture Story of Architect Sooyoul Lee
“건축역사로부터 형태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움은 그 형태를 잘 알고 나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형태의 진정한 의미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건축가의 작품집
어느 날 손진 선생님은 내게 어느 이탈리아 건축가의 작품집을 건넸다. 유학을 결심하고 있던 터라 이것저것 묻고 궁금해 하던 나에게 던져준 대답이었다. 조르죠 그라씨(Giogio Grassi) 작품집, 당시 우리나라엔 건축가 알도로시 외엔 소개된 자료가 없어 낯설었던 이름과 작업들이다.
신합리주의 건축가, 2차 대전 이전에 활약했던 이탈리아 합리주의와 그 연장선상에 있지만 ‘텐덴짜’라 불리며 로저스를 중심으로 까를로 아이모니노, 알도 로시와 함께 이탈리아 건축을 모더니즘 건축의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했다. 건축형태를 기능 만족의 부수적 조건으로 여겼던 근대건축의 모순을 강하게 지적하면서 과거 전통건축이 갖는 형태의 의미와 그 형태를 구성하는 건축요소들의 논리적 이해를 통해 현대 도시의 건축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한다. 시대를 달리하는 건축물과 그 집합체인 도시는 건축의 보고이며, 오늘 우리 작업에 끊임없이 교훈을 주는 스승이다.
그라씨는 수업중 학생들에게 “나는 로마인들이 했던 것처럼, 르네상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건축 작업을 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재 제기되는 건축문제를 오늘의 기술로 만들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했다.
진정한 예술품을 말할 때, 미켈란젤로는 자기가 만든 작품을 벼랑에서 구르게 하여 이런 것 저런 것 다 떨어져 나가고 더 이상 덜어낼 것 없이 남아있는 상태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던가. 그라씨 작품집에 있는 작업들은 지나칠 만큼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고도로 단순화된 형태는 하지만 강열할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통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축적 풍요로움 또한 가득하다.
New vs News
건축이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건축이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논리는 건축의 특성 중에서 흔히 말하는 기능의 합리성에 대해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건축 형태에 관한 것에 그 초점을 맞춰 얘기하고자 한다.
요즘 현대 건축이 쏟아 내는 다양한 형태를 보면서, 건축이 너무 예술을 닮으려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끊임없이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아름다움의 영역을 넓히려는 예술의 속성을 건축이 아무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는 현상은 걱정스럽다. 자칫 건축이 가진 본질적인 가치가 가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즐겨 그리는 집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우선 오각형을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창문 하나와 문 하나로 완성된다. 경사진 지붕은 빗물을 보다 빨리 내려 보내기 위한 형태이고, 네모난 창 과 문은 그 안에서 살기위해 필요한 빛과 공기를 제공하고 드나들게 해준다. 모두 집을 구성하기 위한 기본요소이며 필요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알듯이 그 형태는 집의 한 유형이다.
건축의 형태는 건축으로부터 나온다. 시대를 달리 하면서 만들어진 건축형태는 저마다 그렇게 생긴 이유가 있으며, 그때마다 요구되는 건축적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형태이다.
그라씨는 수업 중에 로마 판테온을 ‘New'라고 말했다. 이천년이 넘는 건축물이 왜 ’New'인가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지만 ‘New'와 ‘News'에 관한 비교설명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이내 잊혀지는 일상의 새로운 사건들은 ‘News'이다.
하지만 로마 판테온은 천오백년이 지나 르네상스 부르넬레스키의 돔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오늘 우리에게 또 다른 건축으로 놀라움을 줄 수 있는 함께 살아있는 ‘New'이다. 건축 형태를 고민하는 우리를 과거 역사 속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동기는 바로 수백 년, 수천 년 전부터 만들어 온 건축 형태 안에 오늘의 건축 문제를 해결할 ‘New'들이 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를 한다는 것은?
좋은 건축물 앞에서 건축가가 일반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왜 좋은가를 고민하는 건축가들의 표정에서 일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던지는 의문 속에 그 형태의 진실을 드러내고 그것이 있게 한 의미 있는 건축문제에 까지 이를 수 있게 만드는 건축물은 경이롭다.
프로젝트를 한다는 것은 바로 의미 있는 건축문제(Problema)를 도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프로그램과 기능을 만족시키는 일은 필요한 것이지만 형태를 결정하는 진정한 동기는 되지 못한다. 역사 도시 안에서 그 기능과 용도는 바뀌었지만 아직도 도시 안에서 훌륭하게 그 역할을 다해내는 건축물을 보면 형태가 만들어진 진짜 이유들, 바로 의미 있는 건축문제들이 형태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처음 한해를 꼬박 스승을 따라 다니며 제기 했던 문제들에 대해 돌아온 대답은 항상 “너는 왜 그것을 하는가”, “왜 그것을 할 필요가 있는가”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을 낼 엄두조차 못 내고 문제를 찾느라 보낸 시간 3~4년이 걸렸다.
요즘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때와 같은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을까 자문해 본다. 너무 쉬운 질문과 간단한 해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프로그램과 기능만족 수준에서 타협하기위한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건축 역사로부터 형태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움은 그 형태를 잘 알고 나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형태의 진정한 의미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라고 한 스승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본다. ANN
이수열 토문건축사사무소 사장, 한국건축가협회 사업부회장
자료_ 이수열, TOMOON
이수열 (주)토문건축사사무소 사장, 건축가
건축가 이수열은 (주)토문건축사사무소 사장이자 한국건축가협회 사업부회장으로 있다.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거장 Giorgio Grassi와 논문을 같이했고, 스튜디오 Liverani/ Molteni와 함께 School Complex, Capiage-Intimano 국제현상설계에 참여해 1등에 당선되기도 했다. 오랜 유학 생활과 현지 실무 경험을 거치고 귀국 후 토문건축사사무소의 디자인 본부장을 거쳐 현재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양대학교 건축학과에 출강한 바 있으며 데일리에이앤뉴스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건축가 이수열은 “건축역사로부터 형태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움은 그 형태를 잘 알고 나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형태의 진정한 의미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라는 본인의 스승인 이탈리아의 거장 조르죠 그라씨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일반건축물 분야의 혁혁한 성과를 나타내왔다. 주요 작품으로 두바이 미하엘 슈마허 비즈니스 애비뉴, 아태무형문화유산전당, 2014아시안게임경기장, LH본사신사옥, 정부세종청사 3단계1구역 등 다수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대표건축가로 참여하거나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