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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이수열의 건축이야기 02 ‘나의 스승 조르죠 그라씨 Giorgio Grassi’

Architecture Story of Architect Soo-youl Lee

등록일 2021년12월25일 06시23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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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이수열의 건축이야기 02 ‘나의 스승 조르죠 그라씨 Giorgio Grassi’

Architecture Story of Architect Sooyoul Lee

 


 

“오래 전 조상들의 삶과 그리고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간과 장소에 대한 가치는 소중한 것이다.”

 


 

 

건축가의 강의

밀라노 도착 후에도 몇 해가 지나서야 그라씨 수업을 들었다. 매주 하루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 까지 진행되는 수업 중 오전은 스승의 강의로, 오후는 조교들과 함께하는 크리틱으로 진행된다.

그라씨는 그동안 해온 자신의 작업을 강의 자료로 사용한다. 여타 다른 이들의 작품 비교가 아닌 자신의 생각과 고민과 결정들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는 작품들을 보여주며 학생들에게 건축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초기 작업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해 온 건축 철학과 그 결과물들을 통해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은 장인정신을 배운다.

그라씨 작품집에서 소개되는 작품의 해설은 많은 수가 “이 프로젝트가 제기하는 건축적인 문제는…” 라고 시작된다. 유학생활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고, 많은 밤을 꼬박 새우며 고민했던 논제이다. 요즈음 내가 이 말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바쁘게 진행되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들을 과연 진지하게 풀어가고 있는가하는 의문이 들어서이다.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또는 그저 소비적인 감상적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현대도시 안에서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노력 없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손에 잡히는 명확한 문제 제기 없이는 그 답은 항상 모호하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축이 좀 더 진지해져야 하는 이유는 단지 겉으로 보여 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건축물이 하나의 교훈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의미가 있을 때이다. 그라씨 작품들에서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문제(problema)와 해답(soluzione)을 통해 건축의 진지함을 배울 수 있다. 그의 작품을 통해 도시를 알게 되고 건축 공간과 형태의 이유를 알게 된다. 자기가 했던 작업을 가지고 후학들에게 강의할 수 있는 건축가의 강의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이탈리아 프로젝트

한일월드컵 열기로 가득했던 그 해에 난 우연한 기회로 이탈리아 젊은 건축가들과 함께 학교 콤플렉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논문을 쓰기 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에 유럽 내 국제현상설계 제의는 나의 도전의식을 자극하기 충분했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 또한 대단했다.

 


 

지리적으로 밀라노와 꼬모 사이에 있는 카피아고 인티미아노라는 작은 도시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복합시설을 집약해서 계획하는 프로젝트였다. 주어진 기초자료를 이해한 후 제일 먼저 이 프로젝트에서 제기할 수 있는 건축적 문제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해결책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는 완성되었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1등 당선 소식을 전하던 이탈리아 친구의 흥분으로 격앙된 목소리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좋아하고 있을 수만 없는 상황이 곧 벌어졌다. 그라씨 팀도 같은 현상설계에 참여했는데 2등이다. 당선을 우리 팀에게 빼앗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제자인 나도 스승인 그라씨도 서로 같은 것을 준비하고 있는지 몰랐으며 스승과 제자 관계가 유난히도 독특한 이탈리아 분위기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 난 1년 이상 스승님을 뵙지 못했다. 당시 문제의 현상설계에 심사를 맡았던 밀라노대학 총장님이 나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으시면서 “너 이제 큰일 났구나”라고 던진 말이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한해가 지나서나 깨달았다.

다행히 그라씨는 이듬해 피렌체에서 큰 규모의 은행프로젝트에 당선되었고, 난 논문을 계속 쓸 수 있게 되었다. 논문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마음을 열고 당시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내손을 잡아주었던 스승님의 따듯한 온기는 내 건축 생활에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도시 내 남아있는 기념비적 건축에 관한 문제

그라씨와 함께 했던 논문의 주제이다. 천년이 넘는 그리고 가깝게는 몇 백 년, 몇 십 년 시대를 달리하는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도시가 바로 밀라노이다. 마치 나무들이 자라며 나이테를 만들듯 시대별로 확장된 도시의 경계가 선명한 도시 형태를 보여준다. 많은 부분이 지워져 버린 서울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세계 어느 도시나 과거로부터 묵묵하게 오랜 세월 도시를 지켜온 건축물들이 있다. 대부분 의미 있는 건축으로서 잘 보존되어 왔다. 이것을 우리는 “기념비적 건축”이라 부른다. 이들 중에는 기능은 바뀌었어도 현재까지 실재 사용되는 것도 있고, 보존과 연구를 위한 것들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생명력을 잃지 않은 그야말로 건축물이며, 후자는 고고학적 자료이다.

 


 

이탈리아 대부분 도시 안의 역사적 건축물들은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필요한 기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는 전자의 경우가 많다.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졌던 병원은 현재 밀라노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2백년 후 건축된 묘지 건물은 사진박물관 및 콘서트장으로 사용된다. 논문에서 제기했던 문제는 이와 같이 시대에 요구에 따라 진화해 가는 여정 속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도시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특별히 나는 기념비적 건축물들의 관계에 대한 건축적인 정의를 통해 이를 풀어가려했다.

 

과거 기능적으로 긴밀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던 밀라노의 병원과 묘지가 오늘날 각각 서로 다른 기능으로 전환되면서 서로 상관성을 잃은 기념비건축으로 남아있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논문의 핵심이다. 도시 발전의 문제는 시대에 맞는 도시 기능 만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 건축물들이 함께 모여 만드는 도시의 형태의 일관성과 개별 건축물들 사이의 관계의 지속성 안에서의 발전을 의미한다.

 

오래 전 조상들의 삶과 그리고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간과 장소에 대한 가치는 소중한 것이다. 하얗게 지우고 새 것을 만드는 방식보다는 있는 것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가 아닐까?ANN

 

이수열 토문건축사사무소 사장, 한국건축가협회 사업부회장

자료_ 이수열, TOMOON

 

 

이수열 (주)토문건축사사무소 사장, 건축가

건축가 이수열은 (주)토문건축사사무소 사장이자 한국건축가협회 사업부회장으로 있다.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거장 Giorgio Grassi와 논문을 같이했고, 스튜디오 Liverani/ Molteni와 함께 School Complex, Capiage-Intimano 국제현상설계에 참여해 1등에 당선되기도 했다. 오랜 유학 생활과 현지 실무 경험을 거치고 귀국 후 토문건축사사무소의 디자인 본부장을 거쳐 현재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양대학교 건축학과에 출강한 바 있으며 데일리에이앤뉴스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건축가 이수열은 “건축역사로부터 형태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움은 그 형태를 잘 알고 나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형태의 진정한 의미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라는 본인의 스승인 이탈리아의 거장 조르죠 그라씨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일반건축물 분야의 혁혁한 성과를 나타내왔다. 주요 작품으로 두바이 미하엘 슈마허 비즈니스 애비뉴, 아태무형문화유산전당, 2014아시안게임경기장, LH본사신사옥, 정부세종청사 3단계1구역 등 다수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대표건축가로 참여하거나 수행했다.

김정연‧전예원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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