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태 교수의 전통건축 읽기 02
초가집의 나이는 얼마일까?
50여 년 전, 1960년대 우리나라 시골에 가면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던 초가집. 초가집의 정의를 보자. 국어사전에는 짚이나 갈대 따위로 지붕을 인 집을 초가집이라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짚이나 갈대를 이엉이라 하는데, 이엉집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이엉의 재료는 볏짚이나 보릿짚, 갈대, 억새, 왕골, 창포, 삼대, 겨릅(대마줄기) 등을 사용한다. 이 재료들은 줄기가 곧바르며, 줄기단면은 속이 비어 둥글고, 표면은 매끄러우면서도 흡수력은 약하여 지붕재로 가벼운 장점이 있다. 또 이엉으로 지붕을 만들면, 보온 및 단열의 효과도 높다. 주거지 주위에 잘 분포되어 있어 구입하기에 용이하며, 비용도 저렴하고, 재단도 쉬워 서민들이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건축재라고 할 수 있다.
이엉과 같이 값싸고 구하기 쉬운 재료로 집을 짓고 살았던 우리 서민의 옛 주택은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지도 않으며, 큰 집을 짓기 위한 큰 나무를 훼손하지도 않는다. 또한 남들에게 권위와 위엄을 보이려고 큰 몸집을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럼 과연 얼마 전까지 우리의 세상을 뒤덮었던 초가집은 과연 언제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발전했을까?
우리나라에 초가집이 처음 나타났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두 가지를 말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석기시대 움집을 그 기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두 번째는 초가집의 모습이 문헌으로 처음 나타나는 초기 철기시대의 무덤모습 주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신석기시대의 주거는 땅을 원형으로 약 60cm정도 파고, 긴 서까래를 고깔모양의 원추형으로 모이게 한 다음, 서까래 바깥에 이엉을 얹어 집을 만들었다. 이렇게 땅을 파고 만든 집을 움집이라고 하는데,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벽체가 없어 어두운 실내를 가지고 있으며 추운 땅바닥을 그대로 사용한, 말 그대로 원시주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의 주거형태를 초가집의 원형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무서까래와 이엉이라는 건축 재료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도 나타나는 주거의 형태이다. 우리만이 가진 특성이 반영된 건축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3~5세기경에 써진 중국의 문헌을 보면, 기원전후시기 겨울집인 움집과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집을 묘사한 문헌이 있다. 후한서 동이전 읍루조를 보면, “土氣極寒 常爲穴居”란 기사가 있는데, 만주 송화강유역에 살고 있었던 읍루국이 겨울의 한기를 극복하기 위해 움집을 짓고 살았다는 내용이다. 즉 한반도 북쪽의 고구려인근에는 겨울집인 움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한반도 남쪽 주거에 대한 기사도 있는데, 후한서 동이전 한조(삼한)에는 “作土室形如冢開戶在上”이라고 하였으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居處作草土室形如冢其戶在上”이라고 하였는데, 그 풀이를 보면 “집을 풀과 흙으로 된 방을 만들고, 집의 모습은 무덤과 같은 형태이며, 땅위에 창과 문을 두었다”라고 할 수 있다. 즉 풀로 된 지붕과 흙으로 만든 방, 벽에는 문과 창이 있으며, 집의 전체적인 모습이 중국에서 볼 수 있는 무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무덤이 우리나라 무덤과 같이 큰 동산 모습의 봉분을 만들었던 것을 참고하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초가집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초가집의 연원은 길게는 6000여년, 짧게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문화재는 기와집이 대부분이다. 초가집이 문화재로 지정될 경우는 국보나 보물이 아닌,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그것도 몇 채 되지 않고, 대부분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장 오래된 초가집으로는 창녕술정리하씨초가(昌寧 述亭里 河氏 草家)로 세종 7년(1425)에 지어졌다고 전해지지만, 해체수리 시 ‘건륭 25년’<영조 36년(1760)>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18세기 중엽에 수리를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한옥의 역사는 수천 년이지만, 현존하는 건축은 수백 년이 안 된다. 그것은 집의 수명이 그 만큼 짧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면, 집의 재료를 흔히 구할 수 있고, 싸고 효율적으로 지었지만, 집의 수명은 그만큼 짧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짓기 쉽고, 흔히 볼 수 있었던 초가집의 이엉은 대부분 함석과 슬레이트로 바뀌었고, 새로 짓는 한옥은 모두 기와로 대체되어 짓고 있다. 이엉을 엮고 얹는 일이 힘들고, 매년 이엉을 교체해야 하는 유지관리가 힘들다는 이유여서다. 게다가 예전에 구하기 힘들었던 기와도 보편화 되었으니, 국민들에게 외면당하는 것은 시장논리로 당연한 것이지만, 이제는 이엉을 엮는 기술자도 사라져 얼마 후면 아예 이엉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지경이다. 반드시 보전해야 하고 활용해야 할 대표적인 전통건축 문화인데도 말이다.
이렇듯 서민들에 의해 지어졌고, 서민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으며, 수천 년 우리 주거문화를 어렵게 이어온 우리의 초가집. 우리가 사랑하고 지켜야할 건축문화가 아닐까? 비록 초라하고 지저분하지만. 우리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같이 이어온 우리 초가집을 지켜주고 사랑해주기를 기대한다. ANN
김상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
김상태 Sangtae Kim 필자는 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학과장)로 몸담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미국 UCLA International Institute, Center for Korean Studies에서 POST DOC.연구과정을 밟았다. 주요 논저로는 신라시대 가람의 구성 원리와 밀교적 상관관계 연구, 7ㆍ8세기 동아시아 2탑식가람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노인행태와 주거설계기법에 관한 연구 외 다수가 있다. www.archisk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