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건축 이야기
김상태 교수의 우리건축 제대로 알기 05
Prof. Kim Sang-tae’s Learn our right architecture, 'A story of a confucianism architecture'
고려의 500년이 불교의 세상이었다면, 조선의 500년은 유교의 세상이었다. 조선은 나라의 시작과 더불어 나라의 끝도 유교와 함께 하였다. 궁궐과 관아,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 사당건축과 별서건축인 정자, 주거건축, 그리고 사찰건축까지도 모든 분야의 건축에서 유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만큼 유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15세기와 16세기가 유교가 극도로 발전한 시기였다면, 17세기와 18세기의 유교는 경직되고 폐쇄적인 자기방어의 시기였다. 19세기의 유교는 조선의 패망을 예상한 듯 사회의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 매우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유교건축이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우리민족의 지혜를 엿보고자 한다. 그리고 유교건축이 주는 교훈을 통해 타산지석의 마음으로 4번째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중심성의 ○과 위계의 ?
○과 1, 현대를 대표하는 디지털의 세계는 이진법을 이루는 두 숫자 ○, 1에 의해 비롯된다. 숫자로서의 ○은 500년경 인도의 수학자가 발견하였다. ○은 중심의 한 점으로 모이는 중심성을 가진 수이다. 1은 모든 수의 시작이며, 으뜸을 의미한다. 위계에 있어 최고를 나타낸다. ○과 1의 두 수의 개념은 불교건축과 유교건축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불교건축은 중심성이 가장 큰 개념으로 나타난다. 만다라나 불화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도상을 접해보면, 모든 도상의 중심에 부타가 있으며, 그 주위에는 보살과 제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천왕과 인왕 등의 신중들이 둘러싸고 있다. 불교의 우주관을 보더라도 불교의 세계는 중심의 한 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의 배치를 따라가면 일주문이 나오고, 금강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긴 누각을 만나게 된다. 그 누각의 정면으로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이 마주하고 서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의 좌우는 보살전과 요사채가 감싸고 있다. 대웅전 뒤의 산에는 산신각과 조사당, 그리고 암자 등 작은 규모의 건축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여러 건축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대웅전 등의 주불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이 가장 높은 위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외각으로 갈수록 그 위계가 점차 낮아지게 된다.
유교건축의 경우는 이와 다르게 마치 군대에서 상급자에서 하급자에 이르기까지 계급별로 죽 늘어선 모습을 보인다. 일렬로 된 계급이 명확하다. 평지에서 맨 앞에 가장 높은 위계의 공간이 위치하고, 뒤로 갈수록 낮은 위계의 공간이 이어진다. 평지에 자리 잡은 향교의 배치에서는 맨 앞의 공간에 대성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성전은 공자와 유교를 빛낸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 스승의 공간이 가장 먼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대성전 뒤로 이어지는 공간이 명륜당의 공간이다. 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강의하고 교육을 하는 공간이다. 마치 선생이 앞에서 걷고 제자가 뒤에서 따라 걷는 듯한 위계가 건축에서도 보인다. 이와 같이 전후(前後)의 공간에서는 전(前)의 공간이 위계가 높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향교가 산비탈의 경사지에 위치하면 배치가 180도로 달라진다. 제자들의 공간인 명륜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스승들의 공간인 대성전이 그 후면에 위치하게 된다. 제자가 위에서 스승의 머리를 쳐다보면 안되는 것과 같이, 높낮이가 생길 때는 높은 곳의 위계가 상위공간이 되는 것이다. 즉 상하(上下)의 관계에서는 상(上)의 공간이 위계가 높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좌우(左右)는 어떨까? 대웅전 앞의 공간에는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동무와 서무가 있으며, 명륜당 앞에는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의 공간이 자리한다. 한자로 일(一)이 가로로 놓인 것처럼 여기서도 위계가 나타난다. 동무는 중국의 유학자들의 위패를, 서무는 한국의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다. 그리고 동재는 상급생들의 기숙사이며, 서재는 초급생들의 기숙사이다. 동과 서에도 위계가 확실히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좌우를 말할 때 좌(左)는 동(東), 우(右)는 서(西)를 의미한다. 즉 좌가 우보다 상위의 위계임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재상들 중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상급자였던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의 중심성 ○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도상이다. 하지만 유교의 1과 一은 상황에 따라 변함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불교와 유교는 그 개념에 있어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우리들은 유교적 사고관을 마치 ‘변함이 없는 위계적 원리’로 생각하고 있다. 앞의 유교건축의 위계성을 통하여 보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대적 변화와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유교의 참 모습을 잘못 이해하고 과거만 연연하고 있는, 우리의 왜곡된 전통에 대한 고집이 아닐까?
그림 1. 부석사배치도. 중심성이 강조된 1400여년 된 가람의 배치이다.
변화하는 역사의 흐름에도 중심적인 원형의 공간구성은 변함이 없다.
그림 2. 도동서원 배치도.
경사지에 세워진 도동서원은 중요건물이
일직선의 축에 일렬로 늘어서 있어 위계성이 더욱 부각된 사례이다.
유교의 우주관, 경회루에 담다
경복궁에 가면, 유교가 보여주고 있는 우주의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건축물이 있다. 경복궁의 가장 중심영역인 근정전의 서편에 위치한 경회루이다. 경회루는 1412년 조선 초기 태종의 지시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다. 경회루는 태종 때 숭례문 등 여러 관방건축의 공사 책임자였던 박자청에 의해 지어졌다. 박자청은 조선 초기, 지금의 국토해양부장관과 같은 공조판서를 역임한 무신출신의 건축전문가였다. 그 아름다운 숭례문을 지었던 감각이라면, 당시 경회루의 모습 또한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림 3. 경회루36궁지도.
이 한 장의 도면에는 유교의 우주적 공간감과 자연의 시간성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의 경회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어 1867년 고종 때 다시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피난으로 화가 난 백성들이 자신들의 임금이 살았던 궁궐을 불태웠던 것이다. 불운의 궁궐 경복궁은 이후 300년간 폐허로 남았다가 고종이 등극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경복궁을 완공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이 패망하게 되었는데, 조선 정궁으로 경복궁의 역할에 있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경복궁에서 경회루는 정사에 시달린 임금들의 쉼터였다. 궁궐의 공식적인 쉼터인 후원에 가기에 시간이 촉박한 임금들은 근정전 바로 옆에 있는 경회루를 이용했을 것이다. 또한 경회루는 외교관의 방문 시, 방문자들을 위한 연회를 열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한 경회루는 유교사상의 우주관을 담아 표현된 천상의 건축을 지향하도록 계획되었다.
1867년 재야학자였던 정학순은 경회루의 평면구성을 주역으로 풀이한 『경회루서(慶會樓序)』를 작성하였다. 장학순은 경회루서에서 경회루삼십육궁지도(慶會樓三十六宮之圖)라는 그림과 함께 유교의 경전인 주역에 나타난 모든 수와 시간의 수를 통하여 이 건물에 우주의 질서와 원리를 담아 계획하였음을 주장하였다.
"其內 第一重爲三間 以象天地人三才, 柱用八 以象八卦, 每間用?四是 三十二象也.
第二重十二間 卽軒也, 象十二月. 柱用十六取十六象 每間用?四是 六十四卦之象也.
是爲 第上層最其外爲第三重 凡二十間卽廊?也. 柱用二十四 以象二十四方 及 逐用節侯.
橋列以三取 以象三光也. 門對以兩取 以象儀也···"
경회루서 본문의 내용을 통해 표현된 수와 그에 적용된 개념을 보면, “1중 3칸=삼재, 1중을 둘러싼 8개의 기둥=8괘, 8면×4개의 창문=32상, 2중 12칸=12월, 2중을 둘러싼 16개의 기둥=16상, 16면×4개의 창문=64상, 3중을 둘러싼 24개의 기둥=24방위와 24절기, 경회루 3개의 다리=3광, 2개의 누문=양의, 지붕=태극” 등을 볼 수 있다.
주역에는 태극으로부터 64상에 이르기 까지 유교에서 표현하는 우주와 시간의 단계가 있다. 태극(1)→양의(2)→4상(4)→8괘(8)→16상(16)→32상(32)→64상(64)로 발전하며, 8괘(卦)는 효(爻)가 3개(乾卦:?)로 이루어져 있는데, 3개의 효는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 3)를 의미한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시간을 의미하는 10간과 12지의 개념이 있는데, 10간과 12지, 그리고 8괘를 조합하여 24방위의 패철이라는 나침반을 만들었다.
이상의 결과를 보면, 경회루는 단순한 임금들의 유희를 위한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임금은 하늘에서 내려준 존재이므로, 자연이 나타내는 시간과 공간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경회루의 평면계획을 우주의 공간적 개념인 주역의 수와 현실의 시간적 개념인 자연의 수로 조합을 했으며, 그 마지막은 우주의 태생 개념인 태극(지붕)으로 덮어 시공(時空)의 완성을 실현했다.
경회루, 실로 위대한 건축물이 아닌가? 우리가 단순히 정자건축으로만 알았던 경회루가 이와 같은 대단한 개념으로 공간, 기둥, 창호에 이르기 까지 세세한 모든 요소가 디자인되었다는 사실이.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던 사상적 개념을 건축에 이처럼 완벽하게 적용한 사례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저 옛날 건축이라고 치부했고, 옛 궁궐의 왕들이 노닐던 시설이라고 생각했던 경회루는 그 어떠한 서양의 유명한 건축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우리건축임을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 4. 경회루 전경. 누정건축의 대표건축인 경회루는 전통건축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리학, 주자와 함께한다. 별서건축
16세기, 조선은 한마디로 피로 얼룩진 사회였다. 4대사화로 알려진 집권파와 개혁파의 싸움은 칼자루를 쥔 훈구집권파가 붓을 든 개혁적인 사림파를 무참히 도륙했던 사건이었다. 성리학의 깃발을 들고 세운 조선은 그렇게 초기의 개혁 정신을 잊은 채 양반의 권력욕으로 변질되어 갔다.
별서건축, 별서(別墅)란 국어사전을 통해보면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을 말한다. 별장이란 말도 통용된다. 우리가 조선시대 많이 볼 수 있는 정자는 별서의 대표적인 건축이다. 16세기 정권다툼에서 밀려나 낙향하게 된 사림들은 자신의 고향집 근처에 별서를 두어 세속을 떠나 이상향으로의 회기를 꿈꾸었다. 12세기 남송에서 태어난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朱子, 朱熹)는 유교의 통치이념의 변화를 꾀하고, 이기론을 주창하여 인간의 선악에 대한 개념을 주장하였다. 정적(政敵)에 밀려 정계를 은퇴한 주자는 자신의 고향인 복건성 우계로 내려가 후학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고향에 있는 무이산에 무이정사라는 자신만의 공부방을 만들고, 그곳에서 그 유명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櫂歌)를 지어 자연과 동화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자연과 우주를 보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주자의 모습은 조선의 성리학자, 특히 세속의 더러움을 잊고자 하는 사림들에게는 하나의 모범답안과도 같았다. 세속의 이치를 따르는 무리들과 정계다툼에서 밀려 자연으로 돌아가 이상향의 이치를 깨닫는 자신들의 모습을 그리며, 주자가 그러하였듯이 사림들은 자신 고향집 근처에 하나둘씩 정자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림 5. 武夷九曲圖, 李成吉, 1592. 조선중기 수많은 화가들은 무이구곡도를 그렸다.
성리학의 성지로, 가고자 하나 너무 멀어 가기 힘든 남중국의 무이산을 조선의 문인들은 그림으로나마 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별서를 대표하는 건축인 정자는 자연을 벗 삼아 쉬고 놀기 위한 집이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림들의 정자는 그 의미가 달랐다. 정자는 의미에 따라 재(齋), 정(亭), 당(堂), 정사(精舍)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재는 개인적인 사적공간을 의미하고, 정과 당은 별당과 같이 학문과 휴식을 겸하는 장소로 많이 쓰인다. 정사는 후진들에게 강론을 하는 장소로 주로 공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정자라고 이야기할 때는 모든 경우가 해당되어 굳이 정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지는 않는다. 16세기에 유행처럼 짓기 시작한 별서건축은 크게 봉화와 안동, 그리고 경주의 영남권과 담양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권으로 나눌 수 있다. 봉화의 청암정과 석천정사, 그리고 한수정은 3대에 걸쳐 차례로 지었으며, 안동일대의 퇴계제자들이 지은 하회의 겸암정사, 학봉 김성일의 만휴정과 석문정 등이 있으며, 경주 이언적의 독락당 계정이 대표적이다. 호남의 경우 그 유명한 소쇄원과 식영정, 송강정, 면앙정 등이 있다.
이 두 지역의 정자들은 세워진 목적은 같지만, 그 모습과 쓰임새는 사뭇 달았다. 영남지역의 정자들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배경삼아 비어있는 장소에 일반 살림집의 사랑채와 같은 모습의 건물을 지어 주로 학문적 소양을 닦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영남의 수법과는 다르게 호남의 정자는 자연에 인공적인 조경을 더하여 그 중심에 정자를 배치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건물의 형태도 소위 ‘3간(間) 4허(虛)’라고 하여 정면과 측면의 3간 규모의 마루로 된 집을 짓고 그 중심에 온돌방을 두어 동서남북의 4방면으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문을 추구하였던 영남과는 다르게 시구와 풍류를 즐기고자 한 호남의 문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배경도 숨어있다. 당시 사림들은 두 개의 학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인 동인과 율곡 이이의 기호학파인 서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권의 집권은 주로 서인인 기호학파가 쥐고 있었다. 항상 정권다툼에서 밀려났던 동인들의 폐쇄적인 건축형태와 언제나 정권을 집권하여 세상의 권세를 누렸던 서인들의 개방적인 건축형태는 세상을 바라보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성격에 따라 건축의 모습도 변할 수 있다는 점, 참으로 건축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림 6. 석천정사(저작권).
양반집의 사랑채와 같은 영남지방의 정자모습을 보여준다.
그림 7. 소쇄원 광풍각.
3간 4허의 소쇄원 광풍각은 사방의 자연을 건축 안으로 흡수하려는 모습을 강하게 보여준다.
조선의 사학 서원. 사유화되다.
16세기 사림의 낙향은 각 지역의 정사건축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자는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지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조선중기 성리학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이황과 이이 또한 정계은퇴 후 후학양성을 위한 정사를 짓게 되는데, 퇴계 이황은 자신의 고향인 안동 토계에 도산서당을 지었으며, 율곡 이이는 해주에 은병정사를 지어 후학양성에 노력하게 된다. 퇴계이황과 율곡이이는 영남(퇴계)학파와 기호학파라는 학문의 계파를 만들어 성리학의 발전을 꾀하게 되는데, 영남학파에는 유성룡과 김성일이, 기호학파에는 김장생과 송시열이 학문의 대를 잇는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두 성현의 제자들은 스승의 학문적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안동에 도산서원과 해주에 소현서원을 세웠다. 이 두 서원을 중심으로 두 학파의 기나긴 정치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영남학파는 많은 성리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이황 이전에도 김종직, 김굉필, 이언적, 정여창, 조광조 등이 있다. 기호학파도 성혼과 김인후, 이이, 그리고 이이의 제자들에 의해 성리학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성리학 성현들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앞 다투어 현대의 사립대학과 같은 서원을 건립하게 되는데, 앞서 말한 도산서원과 소현서원 이외에,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정여창의 남계서원, 정몽주의 임계서원, 김굉필의 도동서원, 이언적의 옥산서원, 유성룡의 병산서원, 김인후의 필암서원, 김장생의 돈암서원, 송시열의 화양서원 등이 있어 그 맥을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그림 8. 도산서원 전경.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도산서당은
그가 가장 중요시 했던 유교규범인 경(敬)과 예(禮)를 건축공간으로 승화한 작으면서도 큰, 유교건축 최고의 걸작품이다.
이러한 연유로 필자는 불국사, 경회루와 함께 도산서당을 한국 3대 전통건축으로 소개한다.
서원의 기능은 향교와 마찬가지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제향(祭享, 配享)과 강학(講學)의 기능이다. 제향은 선현 즉 스승을 향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한 사당을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강학은 스승의 학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한다. 초기의 서원들은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균형적으로 잘 수행하면서 성리학적 발전의 기틀을 견고히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백성들은 유교의 문제점으로 인한 통치의 잘못을 인지하였고, 이에 고려 때 유행하였던 불교로 관심이 증대되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유학자들은 더욱 유교적 통치를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갈수록 유교는 경직화되어 백성들의 원성은 깊어만 가게 되었다.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한 정려를 많이 세우게 되고, 장자중심의 세습이 이루어졌으며, 삼종지의와 칠거지악, 그리고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내외법으로 인한 남존여비사상이 부각되었다. 성리학의 학맥을 연구하고 세상의 진리를 밝혀야 하는 유학자들은 상기와 같은 유교의 경직된 성격을 주도하였으며, 서원 또한 정치적 권력욕을 위해 상대 계파와 대립하는 상황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히 당파싸움이 최고조로 심하였던 숙종 시기에는 295개의 서원이 난립하였는데, 서원의 이름도 사우(祠宇)나 영당(影堂)이라는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사우의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서원의 두 기능인 제향과 강학의 기능 중 제향의 기능만을 강조한 것이다. 학문과 경륜이 뛰어난 성현이 아니라 높은 지위를 가져도 서원을 건립하게 되는 시기였는데, 그 이유는 서원이 학문의 요람이 아닌 정치적 결탁과 상대 계파를 모략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의 정치당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공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서원이 개인의 욕심에 따라 사유화 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 서원은 혈연, 지연 관계나 당파 관계 등과 관련하여 많은 병폐가 생겨났고, 이에 따라 백성들을 토색질하는 거점이 된다는 이유로, 결국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려 각 성현을 대표하는 47개소의 서원만을 남기고 모두 없애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과 어떠한가? 198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은 학문의 요람이요,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지성의 전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는지 여러분은 수많은 정보를 통해 인지하고 있다. 넘치고 넘치는 대학들과 그 뒤에 숨은 사유화된 경영체제, 마치 조선 후기 경직화된 유교세상과 사유화된 서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은 스스로 정화되지 않으면, 외압에 의해 변화하게 된다. 세상을 이끈 학문의 전당인 대학은 스스로 정화하고 개혁해야 하며, 변화의 모범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마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처럼, 언젠가는 사유화되고 비리로 얼룩진 현재의 대학들이 정화가 되는 날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ANN
김상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
김상태 Sangtae Kim 필자는 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학과장)로 몸담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미국 UCLA International Institute, Center for Korean Studies에서 POST DOC.연구과정을 밟았다. 주요 논저로는 신라시대 가람의 구성 원리와 밀교적 상관관계 연구, 7ㆍ8세기 동아시아 2탑식가람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노인행태와 주거설계기법에 관한연구 외 다수가 있다. archisk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