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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래 : 자연을 빚는 자(者) Sculptor of nature

Lee Gil Rae: Sculptor of nature

등록일 2020년09월20일 08시17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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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_ 이길래 : 자연을 빚는 자(者)

“이길래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궁금증을 품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그가 작품의 시(詩)적 일부로 소화한 문명과 자연을 관객이 직면토록 한다”

 

LEE GIL RAE – TIMELESS PINE TREE : 千年(천년), On view September 17 – October 16, 2020

 


 

이길래는 1961년 대한민국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했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자연, 고고학 및 역사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입체 조형언어를 개발했고, 이 과정에서 <잃어버린 城> 연작이 탄생했다. 철과 흙을 혼성한 듯한 해당 연작의 작품들은 원시(原始)의 영향을 보이며, 환경에 대한 그의 질문들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길래의 독창적인 작품들은 금세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제5회 청년미술대상전 특선, 1988년 제11회 중앙미술대상전 장려상 등의 다양한 상을 수상한다. 자연을 본격적인 주제로 삼은 것은 1997년 금호미술관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 <흙에서 땅으로>가 처음이나, 이후로도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작품세계는 갈수록 악화되는 환경 문제들에 꾸준히 초점을 맞추어 왔다. 충청북도 괴산군의 한적한 시골 자락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그는 주변의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찾고, 여기에 나무와 인간의 형태적 요소들을 차용함으로써 다양한 조소 작품을 완성한다. 그의 작품은 수많은 개인전·단체전을 통해 국내 외에도 일본, 미국 등지에 소개되었고, 여러 저명한 컬렉션에서 그의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있다.

 

자연과 특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작가는 자연과의 교류를 지속하는 데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다. 그에게 자연 이상으로 많은 영감을 주는 주제는 없기 때문에 자연을 전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주제로 끊임없이 실험을 벌인다. 이길래의 초기 작품들은 여느 고고학자의 작업방식과 유사한 과정으로 제작되었는데, 땅에 구덩이를 판 후 그가 여러 차례의 ‘발굴’에서 얻은, 흡사 고대의 유물을 연상시키는 물체들을 그 안에서 합치는 방식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굴 껍데기, 올갱이 껍데기, 도자기 파편 따위가 조각에 번갈아 등장하는데 이 물체들은 지나간 과거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럼에도, 작품의 재료로 구리를 선택했던 순간이 그의 작품세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렀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도시를 벗어나 시골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화물트럭 한 대의 뒤를 뒤따르고 있었다. 동(銅)파이프를 가득 실은 차였는데 파이프를 겹쳐 쌓은 모습이 꼭 벌집 같다고 생각했고, 이 장면이 도무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파이프를 켜켜이 쌓은 것뿐이었지만 그에게는 이 장면이 일종의 유기적 형태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고, 더 나아가 생명체까지 연상하게 했다. 한결같이 자연을 탐구해 온 작가정신의 흐름에 따라, 그는 동파이프를 잘라서 원형 고리들을 만들고 이를 용접해 ‘세포 조직’을 만들기로 한다. 이후 그는 <생성과 응집> 연작을 통해 동파이프 조형의 잠재력을 탐사한다. 대형 조형물을 처음 설치한 것도 이 시기이며, 연작 중 가장 이른 작품은 199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생성과 응집> 시기 뒤에는 여러 소재를 혼합한 작품들을 선보이는데, 한국의 전통적 요소들을 함께 섞은 작품 <점에서 선으로>, 야채의 형상을 만든 작품 <생성과 응집-마늘> 및 <생성과 응집-늙은 호박>, 인체의 형상을 만든 작품 <응집-인간> 등이 있다.

 


 

산업사회의 급속한 발전은 산림 파괴 등의 위중한 환경 문제들을 야기했고, 자연의 균형은 전에 없던 절박한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이길래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소나무> 연작은 이러한 위기의식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시각적·개념적 은유를 통해 그는 자신의 작가적 사유를 연장했고, 나무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대화’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풀어나간다. 소나무 작품들에서 그가 선보인 미학 언어는 가장 한국적인 상징으로 기능해왔던 소나무의 역할을 반영함과 동시에 장수(長壽), 고결, 화합의 가치를 품었던 영적 차원의 소나무도 함께 다룬다.

 

대장장이가 망치로 철을 다루듯이, 그 역시 원형의 동파이프 조각들을 망치로 두드리면서 원하는 모양을 잡는다. 타원형으로 변한 동파이프 조각은 <소나무> 연작의 세포가 되고, 함께 모여 나무껍질을 닮은 구조물을 조성한다. 작가는 조형물에 동파이프 조각을 하나씩 용접하는 자신의 작업방식이 ‘화가가 캔버스 위에 붓질을 하나씩 쌓는 것과 비슷하다’고 곧잘 설명하지만, 사실 그의 작업방식은 건축가의 작업과도 닮은 면이 있다. 우선 <소나무> 조각이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웅장해진다는 점이 건축물과 유사하고, 단 하나의 조형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초안과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 점 또한 건축학적이다. 작가의 스케치에서는 선들이 서로 꼬였다 풀어졌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입체 구조물을 최대한 정확히 설계하기 위해서이다. 작품의 형이상학적 의미들을 유념하는 동시에 재료의 물성과 특징들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이길래의 시선에는 건설 노동자의 관점도 섞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잡한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소나무> 연작의 특성상 제작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길래가 생각한 ‘나무’의 이미지는 일단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만 하면 비길 데 없는 중압감으로 공간을 압도한다. 작품의 다공질 구조는 곧 빛이 투과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그는 재료의 물성을 탐구하는 것 외에도 조명이라는 변수를 실험하면서 자연의 왕성함을 더 잘 표현하는 방법을 거듭 고민한다.

 

즉, 전시에 작품을 선보이는 과정을 통해 이길래는 새로운 종류의 대안적 현실을 구현한다. 그가 지어낸 자연은 사색하는 존재이자 투쟁하는 존재이며,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인간의 공간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넣는 것까지 감수하는 치열한 존재이다. 이길래는 기하학과 미니멀리즘 외의 조형언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자연을 최대한 사실에 근접하도록 재현한다는 목표를 위해 그는 기하학과 미니멀리즘이 허용하는 모든 가능성을 샅샅이 탐색한다. 예컨대, 그는 자연적 생명체를 규정하는 근본적 성질들을 자신의 ‘나무’에도 적용했는데, 나무의 겉모습만 본뜨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 그러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만든 연작의 작품들은 모두 한 그루의 소나무에서 나왔다고 사람들한테 설명하는데, 정말 하나도 과장하지 않은 말이다. 전체적인 수형(樹形), 그루터기, 뿌리, 솔잎, 나이테, 옹이, 겉껍질 등에서 일부를 가져온 후 거기에 수정과 변형을 가해서 완성된 작품을 만든다.” 즉, <소나무> 연작의 작품 하나하나는 개별적인 식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은 하나의 ‘숲’ — 초현실주의적 모양으로 자라나는 영생하는 나무들의 숲 — 에서 뻗어 나온 일부이다. <새로운 소나무>, <노송>, <천년-노송>과 같은 제목들을 실마리 삼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이 작품들이 소나무가 성장하며 거치는 진화의 단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작가의 섬밀한 접근방식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소나무의 모습을 최대한 가깝게 재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동선(銅線)을 사용해 나이테와 솔잎을 만드는가 하면, 금속을 부식시켜서 소나무 껍질에 곧잘 끼는 이끼를 표현하기도 한다. <천년-소나무-20> 및 <노송-2019-12> 등의 작품에서 채용된 다양한 질감은 미메시스의 작용을 증강한다. 하지만 금속이 현대화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를 재료로 식물을 재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문명이 점령한 땅을 자연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고, 영생하는 금속질 나무를 지구의 표면에 심는 것이 그 일환이라면, 그의 작업은 양가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나무들이 문명화된 세계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초현실주의적 형상을 지닌 덕분이지만, 유기적 조형을 추구하는 그의 미학적 언어 때문에 작품에서 똑같은 형태가 반복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가지가 잘려 나간 <천년-소나무-8> 및 <천년-소나무-7>의 모습은 인간의 억압을 한탄하는 것처럼 보이나, 반면 같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 <천년-소나무-9> 및 <천년-소나무-14>는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장악하면서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무력화한다. 기존 작품들은 수직 구조물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해당 두 작품의 ‘나무’들은 이와 다르게 벽에 걸려 있다. 예측을 벗어나는 그의 수상한 설치 방식은 ‘낯섦에 대한 우려’를 촉발한다. ‘낯섦에 대한 우려’는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1919년 저술에서 언급한 개념인데, 사물 자체는 일상적이거나 익숙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도를 가늠할 수 없는 경우를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고로, 정형화된 형태에서 탈피해 버린 이길래의 자연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벽에 걸려 있는 ‘식물적’ 형태는 도대체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질문인데, 당신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나?”

 


 

상기의 철학적 질문들은 이길래 작품세계가 왜 우리에게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거무칙칙하고 뒤틀렸으나, 섬세하면서 얇기도 한 그의 나무들은 공간 속에 웅장하게 솟아오르며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인 환경 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궁금증을 품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그가 작품의 시(詩)적 일부로 소화한 문명과 자연을 관객이 직면토록 한다. ANN 

출처_ 오페라갤러리

 

이길래_ 작가

로르 마르탱 Laure Martin_ 평론

 


 

ABOUT OPERA GALLERY_ 1994년 질 디앙에 의해 설립되었고 그의 진두지휘 아래 현재 전 세계적으로 12개의 갤러리를 가지고 국제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오페라 갤러리는 유럽, 미국, 아시아의 모던 & 컨템포러리 미술을 이끄는 대표적인 갤러리 중 하나로, 오페라 갤러리의 컬렉션은 개인 컬렉터들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공공 기관에 대표적인 컬렉션으로 자리하고 있다. 오페라 갤러리는 현재 파리, 런던, 제네바, 모나코, 뉴욕, 마이애미, 아스펜, 싱가포르, 홍콩, 서울, 베이루트, 두바이에 자리 잡고 있다.

Founded by Gilles Dyan in 1994 and now internationally established with 12 galleries worldwide, Opera Gallery is one of the leading dealers in modern and contemporary European, American and Asian art, placing works in major private collections as well as leading public institutions. Opera Gallery has galleries in Paris, London, Geneva, Monaco, New York, Miami, Aspen, Singapore, Hong Kong, Seoul, Beirut and Dubai.

 


전시장에서 작가 이길래

안정원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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