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DERTWASSER : THE GREEN CITY
훈데르트바서의 '더 그린 시티'展…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일탈이고 건축을 위한 건축은 범죄이다.”
독특한 예술세계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훈데르트바서의 서울전이 3월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마련된다. 전시의 주제로 내걸은 ‘더 그린 시티(The Green City)’처럼 화가이자, 건축가, 환경운동가로 활동해온 훈데르트바서(1928~2000)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창조적이고 매혹적인 작업을 선보여 왔다.
“혼자 꿈을 꾸면 꿈에 그치지만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훈데르트바서의 말처럼 평생을 평화주의자이자 자연주의자로 살며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는 1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유대인인 어머니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경험에 기인한다. 스스로 개명한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 역시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란 의미처럼 훈데르트바서는 전 생애에 걸쳐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강렬한 색채와 유기적인 형태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간 훈데르트바서는 식물적 회화법이라는 독특한 작업방식으로 그린 나선형 그림들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20세기 말에는 건축가로서도 큰 명성을 얻었다. 유기적인 형태와 독창적인 건축 개념들이 녹아 들어가 있는 그의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 블루마우 리조트,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등의 친환경적인 건축물들은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들로 각광을 받고 있다. 훈데르트바서는 일생에 걸쳐 수많은 환경보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원했으며, 1980년 워싱턴 D.C.시장은 ‘11월 18일’을 ‘훈데르트바서의 날’로 선언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가우디와 더불어 가장 독창적이라고 평가받는 훈데르트바서의 건축 모형, 환경에 대한 그의 신념이 담긴 포스터 작품들 등이 총 망라되어 전시된다. 훈데르트바서 비영리 재단과 오스트리아 쿤스트하우스빈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중심으로 대표작 ‘타시즘을 위한 오마쥬’ ‘노란 집들-함께 하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는 것은 아픕니다’를 포함한 회화 100여점,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 등 건축 모형 작품 6점, 수공으로 제작된 태피스트리 5점, 환경포스터, 건축디자인 스케치 등 총 140여 점이 전시된다.
자연에서 받은 창조적 영감을 바탕으로 식물적 회화법을 통해 작업한 훈데르트바서의 회화 작품은 식물이 자라나는 것처럼 천천히 사랑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대부분의 물감을 제조했으며 주로 여행하는 곳들에서 발견한 재료를 모아 만든 색들도 작업했다. 구체적으로 작품 작업시 아프리카 한 사막에서 담아온 흙이나 프랑스 여행지 해변에서 주워온 작은 돌로 색을 만들어서 썼다. 그는 작업실을 별도로 두지 않고 자신이 머무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그림을 그렸다. 작가의 작업 방식은 절대로 이젤을 사용하지 않았고 캔버스나, 포장지 등을 수평으로 눕혀서 작업을 한 것으로 특이하다. 수평의 것은 자연의 것이고, 수직의 것은 부자연스럽고 인공적이라는 신념을 작업을 할 때에도 고집스러울 만큼 지켜낸 셈이다. 이젤에서 그린 그림과는 달리, 훈데르트바서의 몇몇 작품들은 위, 아래가 없는 것이 특색 있다. 또한, 작가는 하나의 작품에 수채 물감, 유화 물감, 유성 펜, 아크릴, 템페라, 오일, 금속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으며, 종이와 캔버스는 물론 프린트지, 포장지, 나무판, 천 조각, 버려진 종이 등 다양한 곳에 그림을 그렸다.
물감의 대부분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작가의 그림은 항상 조화를 강조하며,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림이 완성되면 훈데르트바서는 정원에 나가 나무나 꽃들 옆에 세워놓고 자연 속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나선의 형태 역시 훈테르트바서의 회화 작품에 두드러지며 나선은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 끝없이 돌고 도는 나선을 통해 우리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훈테르트바서는 색을 조합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며 생명의 다양성과 무한함을 자유롭고 대담한 컬러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색채의 마술라라고도 불린다. 훈데르트바서는 직접 석판화, 실크스크린, 동판화, 컬러 목판화 등 다양한 그래픽 기법을 습득하고, 혁신을 추구하기도 했다. 특히, 쇠퇴해 가고 있던 일본의 전통 목판화, 유키오에 예술을 부활시키고 재활성화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을 소유하는 기쁨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그래픽 작업이었지만 결코 대량생산을 하지는 않았다. 같은 작품이라도 색의 변화를 줘서 각각의 독창적인 작품이 될 수 있도록 작업했다. 훈데르트바서는 흐린 날, 특히 비오는 날을 좋아했다. 비오는 날에는 세상이 촉촉해지면서 본래 사물이 가진 생명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비와 관련된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이 때문에 그 자신의 중간 이름을 독일어로 비 오는 날인 레겐탁(Regentag)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HWG 30/660 SHADOW OF THE STARS ⓒ2016 NAMIDA AG, Glarus, Switzerland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일탈이고 건축을 위한 건축은 범죄이다.” 정식으로 건축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가우디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건축물들을 많이 남겼다. 훈데르트바서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기능주의와 실용주의에 근간을 둔 현대건축이 사람을 병들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예술이 행복한 삶의 추구에 기초하고 있는 만큼 인간이 실질적인 삶을 영유하는 건축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을 것이다. 건축가 훈데르트바서는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공간, 집을 세 번째 피부라고 말한다. 그 첫 번째 피부가 우리의 피부이며, 두 번째 피부는 의복, 세 번째 피부는 주거 공간이기에 세 번째 피부를 통해 우리의 존재성을 나타내고 창의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밝힌다. “진정한 건축이란 사람들이 그 공간에 이사 온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 훈데르트바서의 말에는 입주자와 건축물을 밀접한 상호관계의 중요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그의 건축물들은 오스트리아 빈의 ‘쿤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 1983~1986)와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Wien,1991),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주의 ‘블루마우 온천마을’(Blumau, 1993~1997) 등 50여개에 달하며 특유의 유기적이고 개성을 강조한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를 통해 훈데르트바서는 건축을 통해 지상낙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줄기차게 실천하였다. 빈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쿤스트하우스 빈’은 이러한 훈데르트바서의 철학이 올곧이 투영된 작품으로 메마른 건축에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시도한 것이다. 훈데르트바서의 건축은 사는 사람의 개성과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각기 다른 창문 디자인(창문권리), 자연과의 조화(나무 세입자, 지붕 정원), 산책할 수 있는 언덕 집 등 그만의 건축 콘셉트들이 녹아 있다. 이렇듯 건축가 훈데르트바서의 건축물은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이 나무와 풀로 둘러쌓여 있으며 지붕은 다시 대지가 되어 나무가 자라나고 이를 통해 푸른 세상이 펼쳐진다. 현재까지도 보편화된 옥상정원 개념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칭해진다.
630 YELLOW HOUSES - IT HURTS TO WAIT WITH LOVE IF LOVE IS SOMEWHERE ELSE ⓒ2016 NAMIDA AG, Glarus, Switzerland
“나무는 5분이면 잘라낼 수 있지만, 자라는 데에는 50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과학 만능주의적 파괴와 환경적 진화의 차이점입니다.” 평생을 자연주의자로 살았던 훈데르트바서는 녹색운동의 붐이 일어나기 일찍 전부터 환경운동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건축, 인간의 사회나 생태계, 어디에서든 지진계가 지진을 감지하듯, 직감적으로 위험과 그릇된 성장을 감지했다. 그 자신이 직접 자연을 지키고 자연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선언문을 쓰고 원자력 발전 반대, 해양과 고래 보호, 우림 보호 등 자연보호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포스터를 제작했다. 기존 작품들을 태피스트리로 변형시킬 때 훈데르트바서가 가장 우려했던 점은 프리핸드로 작업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작가는 형판 없이 작업을 해야만 작품에 숨을 불어넣을 수 있으며, 감정이 없는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진실한 예술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대로 작업한 첫 태피스트리 작품인 ‘133 Pissing Boy with Sky-Scraper’ 이후, 모든 태피스트리 작품들은 그가 직접 선별한 직조공들에 의해 형판 없이 만들어졌다. 모든 훈데르트바서의 태피스트리는 유일무이한 작품들이며, 추가 에디션은 제작되지 않았다. 또한, 훈데르트바서는 세계적인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후에 가장 과학자적인 재능을 보였던 최고의 아티스트로 손꼽힌다. 가정의 폐수처리를 위해, 훈데르트바서는 수생식물을 활용한 생물체 정수시스템을 디자인하고 다양한 버전을 제작해 직접 사용했다. 그는 디자인 스케치와 각각 실내와 실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식물들의 리스트까지 만들어서 쉽게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시도했다. 컬러, 사이프러스 잔디, 부레옥잠, 파피루스, 속새, 자주달개비, 알로카시아, 잔가지가 얽혀 있는 골풀, 줄기 무화과 등의 실내용 식물과 갈대, 이엉, 부들, 수생 박하, 수생 붓꽃 등의 실외용 식물을 응용 발명품이 그 예이다.
ARCH 100/Ⅰ THERMAL VILLAGE BLUMAU - ARCHITECTURE MODEL ⓒ2016 Hundertwasser Archive, Vienna
“파라다이스는 이곳에 실존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 지구상에 파라다이스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예술 이외에도 건축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훈데르트바서는 자연보호, 산림운동, 반핵운동을 통해 환경운동 실천가로 살아갔다. 생태주의를 설파하며 캠페인 포스터를 제작하고 시위에도 참여하는 방식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는 평소 자신의 지론을 끊임없이 펼쳐갔다. 그러던 중 2000년 태평양을 항해하던 배의 갑판에서 71세 나이로 심장마비로 생을 다한다. 훈데르트바서는 자연에서 만들어진 곡선을 존중하며 유기적인 흐름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 속에 도시의 메마른 건축을 치료하며 자연과 인간의 행복한 공존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시도함으로써 건축 치료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훈데르트바서가 보여주는 ‘더 그린 시티’는 21세기 현대도시의 최대의 과제 중 하나인 도시 속의 환경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현실을 상기시켜 주는 수준 높은 전시로 관람객들에게 적지 않은 교육적 감동을 주고 있다.
강선아 ‧ 오동건 기자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화가, 건축가, 환경운동가
주최_ 훈데르트바서 비영리재단, (재)세종문화회관, (재)연세문화체육재단, KBS N, 주관_ ㈜스타앤컬쳐
자료_ SNC art & culture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