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재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마스터 인터뷰
시간과 환경의 변화와 어우러지는 디팰리스의 모습을 기대하며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최대한 어우러져서 디팰리스가 오래도록 서울 강북 지역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당당하게 서있기를 기대해"
프로젝트의 시작
2016년 늦가을, 사연이 아주 많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1993년 최초 건축 허가를 득하여 착공하였으나, 여러 차례 공사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여, 2003년 공정률 85%에서 공사가 중단되었고, 그 후로 약 13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2016년 법원의 공매를 통해 새로운 사업 시행자를 만나게 된 사업이다. 많은 사람이 리모델링 프로젝트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은 완공되지 못한 채 장기간 공사가 중단된 사업을 설계 변경과 철거 및 재시공을 통해 완공시키는 프로젝트였다.
설계 업무 착수와 함께 처음으로 현장 답사를 다녀온 실무자로서의 소감은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훨씬 앞섰다. 2,000년 이전의 감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외관과 10여 년간 뽀얗게 쌓인 현장의 먼지들과는 달리, 각종 집기류는 각층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고, 각종 마감재도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공사 현장이라기보다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비현실적인 공간을 탐험하는 느낌이었는데, 걱정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어디까지를 남길 수 있고 어디까지를 변경할 수 있을지 아직 미지수라는 점이었다.
변경 계획의 범위 설정
변경 계획을 수립하고 확정하기 위해서는 기존 건축물이 어떠한 인허가 절차를 거쳤는지, 어떠한 인허가 조건을 부여받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디팰리스 프로젝트는 현행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이전의 법령인 「도시재개발법」에 의하여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도심재개발사업(현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인데, 최초 정비구역 변경을 고시한 1992년부터 공사가 중단된 이후 이전 시행사가 마지막으로 사업 시행계획 변경 인가를 득한 2004년까지의 기간은 요즘처럼 인터넷 기반으로 관이 민간에게 정보를 최대한 공개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래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조차 녹록하지 않은 작업이었으나, 다행히도 발주처가 공매로 사업을 인수하면서 법원이나 종전 건설사를 통해 확보한 자료의 주요 단서들을 통해 어떠한 인허가 절차로 지금까지 왔었는지 큰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과거 고시문을 스캔해 놓은 대한민국 전자관보 사이트를 이용하여 하나하나씩 채워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허가 절차를 파악했다 할지라도 2016년에 바라본 1992년은 까마득히 먼 옛날이야기였다. 특히 2,000년을 전후로 하여 「도시계획법」이나 「도시재개발법」이 폐지되고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나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등이 제정되면서 「건축법」의 내용 중 일부는 또한 도시계획 관련 법률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2016년의 기준으로 도시와 건축 관련 법규를 검토하기 보다는, 각종 법규나 계획 기준의 연혁을 면밀하게 추적하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했다.
이러한 검토에도 불구하고 전면 철거 후에 신축할 것인지 또는 설계 변경 후에 준공할 것인지, 후자의 경우라면 설계 변경의 범위를 매스까지 크게 건드릴 것인지 또는 작게 할 것인지, 이러한 고민의 해답을 구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는데, 의외로 단순·명확한 기준 덕분에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여느 주거지와는 차별된 본 사업지의 입지적 우위는 경희궁과 덕수궁 사이에 있고, 남서쪽으로는 구러시아공사관이 연접해 있으며, 현재 남측과 동측으로 연접해 있는 미대사관저 부지에 과거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덕수궁 선원전이 조만간 복원될 예정이라는 점 등, 생활 속에서 조선시대 주요 문화유산을 바로 접할 수 있는 아주 특색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들 중 남서쪽으로 연접해 있는 구러시아공사관은 사적 제253호 국가지정 문화재로서 「문화재보호법」으로 보호를 받는 대상인데, 민간이 인근에서 건축 행위를 하는 경우 국가지정 문화재를 보호하는 방식도 오늘날에 와서는 1992년과 비교하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신축일 경우 과거에는 심의를 통해 배치와 규모를 결정했다면, 현행 기준은 해당 ‘문화재 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에 근거하여 일정 거리 내에는 신축을 불허하고, 또 일정 영역은 문화재 앙각을 적용하여 건물의 높이를 낮추게 되어있기 때문에, 본 사업은 과거의 협의 내용을 유지하고 건축물의 규모와 매스 형태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변경 계획 수립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계획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2004년 마지막 사업시행변경인가 당시 건축도면과 기 시공 현황을 살펴보자니 무겁고 경직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사실 2004년 도면이라 할지라도 1993년에 최초 허가를 받고 진행해왔던 사업이므로, 착수한 지 20년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현재의 감성과 괴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할 것일 터였다. 분명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었으나 그에 앞서 정량적인 부분을 먼저 정리하는 것이 순서였다.
다행히 앞서 변경 계획의 범위를 검토하면서 각종 법규 연혁의 변경에 따른 대응계획의 틀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위별 골격을 유지하면서 평·단면 계획의 문제점을 도출하고 보완계획을 수립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다음의 다섯 가지 보완 계획은 그러한 내용들 중 크게 드러나는 대표적인 것들만 추려본 것이다.
단지 내 조경은 대부분 높은 화단 턱으로 계획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건축물의 전면부 입면과 통행로를 인지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공개공지의 개방감을 느끼기 어려운 계획이었다. 이에 화단 턱을 최대한 낮춰서 개방적인 공개공지가 되도록 하였다. 기존 계획은 전면도로와 주출입구 사이에 차량 통행로가 가로지르도록 되어있어 보차 혼용으로 인한 사고가 우려되었다. 또한, 지하 1층 근린생활시설과 지하 2층 운동시설이 계획된 시설 치고는 일반인들의 동선을 지하까지 유입시키기에 부족한 외부 수직 동선 계획이 반영되어 있었다. 이에 보행자의 안전을 고려하여 주출입구 전면 차량 통행로를 삭제하고 선큰 광장 최대한 확보하여 지하층 활성화를 도모하도록 하였다.
최상층 옥상은 옥상정원으로 활용할 계획이 없었던 관계로, 각종 팬과 구형 냉각탑 등이 불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장비 레이아웃을 변경하여 정원으로 활용 가능한 공간을 확보하였고, 과도한 높이로 인하여 시야를 가리는 파라펫을 대체하여 투시가 가능한 유리난간으로 변경하였다.
각 층별로 일률적인 세대 구성이던 기존 계획을 대신하여 고층부 공동주택과 저층부 오피스텔 모두 상부에 대형 평형을, 하부에 소형 평형을 배치하는 등 단위세대 평면의 크기와 형태를 다양화하였다. 특히 공동주택에서는 당초 복도에 면하는 침실이 계획되어 있었고, 그 침실이 외기가 아닌 공용부 실내와 면하는 단점을 없애기 위해, 과감하게 아트리움을 철거하고 세대를 복도까지 확장함으로써 해당 세대가 2면 개방의 맞통풍이 가능한 구조가 되게 함은 물론 프라이버시 침해의 우려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하였다.
아직까지도 이유를 모르는 부분 중 하나는 수영장 하부에 전기실을 계획하였다는 것이다. 누수에 철저히 대비할 수 있다면 관계가 없겠으나, 설계 변경에서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수영장 하부 전기실과 발전기실의 위치를 기계실과 맞바꿈으로써 안전사고의 위험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건축 디자인
변경 계획 수립을 통해 앞으로의 모습에 대한 어느 정도의 윤곽을 잡은 이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고민한 부분이 바로 정성적인 접근이 필요한 외관 디자인이었다. 변경 계획의 범위 설정 단계에서 내린 결론은 규모와 매스 형태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설계 변경을 추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 할 수 있는 디자인은 하얀 도화지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운신의 폭이 넓은 작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중하게 된 것이 바로 마감재 그 자체였다.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도심부 재개발의 방식은 낡은 도시 조직을 되살리기 위해 민간이 도로와 공원 등 정비기반 시설을 확보하는 대신 용적률 인센티브를 부여받는 철거 재개발이 위주였다. 하지만 2016년 고시된 2025 서울특별시 도시·주거환경정비 기본 계획의 주요 내용과 같이 지금에 와서는 재개발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흔적을 남기고 보존하여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살리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그 기조는 상당 기간 유지될 것이므로, 이러한 시각에서 사업지를 포함하는 정동 블록까지 시야를 확대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서측 새문안로 남측 변으로는 용적률 1,000% 내외의 정비사업을 완료한 상업지역 건물이 즐비하지만, 새문안로2길, 덕수궁길 그리고 정동길 변으로는 고궁이나 근대 건축물 등 과거 도시 조직에 걸맞은 상징적인 건물이 주거지역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분에서, 본 사업지가 보존과 개발, 과거와 현재의 대비 속 접경지대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건축 디자인에 대한 고민의 초점은 조적식의 과거 건축물들과 유리나 금속 마감의 현대적인 건물들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는 것이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살리면서도 자신의 의미와 완성도를 갖춘 건축물이 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로 당초 서양 고건축 외관을 차용한 화강석 몰딩과 마감과 같은 이질적인 모습이나 주변 컨텍스트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 모습보다는, 주변 컨텍스트의 신·구 두 가지 성격이 함께 투영된 디자인이 더 설득력과 공감대를 얻을 것으로 기대했다.
벽돌은 유리와 금속에 견주어 과거를 대변할 수 있는 전통적인 재료이다. 본 프로젝트에서는 기존의 SRC 구조물 덕분에 하중까지 받을 필요가 없는 단순 마감재의 역할이지만, 윌리엄 홀(William Hall)이 자신의 저서 ‘브릭(Brick)’에서 이야기했듯이, 벽돌이 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그 질감과 촉감, 크기는 물론 구축의 방법까지도 남다른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 CD에 밀려 더 이상 LP를 생산하지 않게 된 때에, 많은 LP 매니아들이 CD가 갖는 디지털의 태생적인 한계를 지적하면서, 더 이상 아날로그의 순수한 감성을 느낄 수 없음을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는 실물로서 데이터를 담고 있는 매체마저 사라지고, 데이터 통신을 통해 음악을 감상하는 추세다보니, 개인적으로는 CD로 음악을 듣는 행위 자체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게 되는데, 비록 순수 조적식 건축물과 같이 구조재와 마감재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경우는 아닐지라도, 시스템 패널의 마감재인 벽돌이 사람에게 주는 감성은 분명 타 건축 재료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처음 시작을 사연이 아주 많은 프로젝트라고 소개했는데, 그 많은 사연만큼이나 2020년 디팰리스의 준공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것이다.
1990년대 초에 시작된 한양도성 도심부 재개발 사업지구 중 하나가 20여 년 만에 완공된다는 것, 신문로2구역 내 도로와 공원 등 기반시설 일부가 20여 년 만에 완성된다는 것, 13년 동안 공사가 중단되어 도심지의 흉물로 자리하던 애물단지가 최고급 주거 복합시설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과 같이, 기나긴 여정의 끝이라는 의미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준공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운영의 시작이다. 또한 인근의 구러시아공사관이나 덕수궁 선원전 복원 등 주변 환경 변화와 함께 디팰리스의 모습도 함께 변해갈 것이다. 그러한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최대한 어우러져서 디팰리스가 오래도록 이 지역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당당하게 서있기를 기대한다는 설계자의 욕심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ANN
인터뷰_ 이일재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마스터
자료_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대림산업, 사진_ ANN 신지환, 김현수